면임(面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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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면의 지방행정 사무를 책임진 향소(鄕所)의 임원.

개설

조선후기 지방 통치에서 향소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면의 책임자인 면임(面任)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면임은 지방행정 사무 전반을 담당했으며 품관·출신(出身) 중에서 선임했다. 면임과 풍헌(風憲)을 두는 지역도 있고, 면임을 두지 않고 풍헌만 두어서 면임의 역할을 대신하는 지역도 있었다. 19세기로 가면서 평민들이 면임으로 진출하게 되어 향촌 사회의 신분제적 질서에 도전하고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담당 직무

면리제(面里制)는 조선전기부터 시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면은 군현의 동서남북을 구획하는 사방 면이며 리는 행정 구역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자연 경계를 바탕으로 행정촌을 대신하는 면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신분층의 동요와 농민층의 급속한 분해에 따라 삼정(三政)이 문란해지고, 농촌 내부의 부세(賦稅) 분정(分定) 체제도 갈등을 야기하게 되었다. 상업 발달에 따른 평민 부호층의 성장과 양반층의 급속한 증가로 향촌 사회 내부에서 신향과 구향의 대립이 발생하면서 이런 갈등을 조절할 전통적인 질서 체제 역시 와해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지방 통치에서 향촌의 최하부 구조까지 투영하는 보다 강화된 통치 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향약이나 사족 지배 체제를 대신해서 향촌 사회를 운영할 새로운 하부 행정 조직과 구성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된 것이 면리제이다. 17세기부터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까지 시행하면서 보다 강화된 행정 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면리제의 구성원으로도 기존의 향리층을 배제하고 사족-품관층과 평민층으로 구성된 새로운 조직을 구상하였다.

면임은 면의 대표자로서 보통 1면에 1명을 두었다. 다만 지역에 따라 면의 명칭이 일정하지 않았다. 향이라고 하는 곳도 있고, 한성부와 평안도는 방(坊), 함경도에서는 사(社)라고 했다. 이에 면임의 호칭도 향정(鄕正), 도윤(都尹), 방임(坊任), 사임(社任), 면장(面長), 면관(面官) 등으로 다양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면임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71년의 기사이다(『현종실록』 12년 3월 21일).

면리제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향소와 면임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안정복은 『임관정요』에서 예전에는 수령을 친민지직(親民之職) 즉,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향소가 친민지직이라고 했다. 지방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면임이나 풍헌 1명을 잘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면임의 임명 대상은 재지사족(在地士族), 품관, 향품(鄕品), 출신 등이 권장되었다. 면임의 선발은 향촌의 원로와 좌수(座首), 향소의 추천을 받거나 여러 지역의 공의(公議)를 얻어 수령이 임명했다. 새로운 향촌 행정 조직의 상부에 사족, 품관층을 두고 그 아래 실무 집행자인 이임(里任), 이정(里正)과 같은 하급 실무직에는 평민층을 동원해서 사대부의 이상인 사족 중심의 향촌 운영 구조와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국가 행정 사무의 효율성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대신 모든 부정부패의 주범으로 지목 받는 향리층을 적극 배제하고자 했다.

면임은 관(官)의 명령을 선포하고 민간에게 가르치면서 민정을 살펴 관에 전달하는 임무를 가졌다. 그래서 면임은 관의 눈과 귀, 팔과 다리가 된다고 했다. 또 지방의 풍속과 윤리, 질서를 관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도덕과 행실이 모든 사람의 표준이 되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며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 소송보다는 화합으로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 신분 질서와 강상 윤리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사람, 각종 부세(賦稅)와 재정 사무, 환곡의 분배를 공평하고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면임의 임무는 지방행정 사무 전반에 미쳤지만 특히 중요했던 부분이 부세 징수, 한정(閑丁)의 색출과 같은 부세 임무의 집행이었다. 지역 주민과 친족 간의 분쟁과 불법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가능하면 소송으로 발전하지 않고 작은 일은 스스로 처리하게 했다. 또 소송이 발생하면 불법을 저지른 자, 친족과 가족 간의 도리를 파괴한 자를 적발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부호와 토호의 무단과 행패를 저지하고 빈민을 구호하며 보호하는 것도 면임의 중요한 임무였다.

이상적인 면리제 운영을 구상했던 사람은 면임의 이러한 임무가 향촌 내부에서 자율적이고 자치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랐다. 면임은 수령의 행정을 면에서 대신하는 자로 수령은 면의 행정을 면임에게 위임하고 감독하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변천

면리제는 실제 행정 집행 과정에서 면임과 향촌의 자율적 지위가 손상되기 쉬웠다. 정부 입장에서는 재지 세력을 언제나 토호화할 수 있는 계층으로 간주하거나 행정 담당층으로 보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많은 사무에서 면임에게 연대책임을 지우거나 책임을 묻다 보니 면임이 처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사족층은 면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정부는 사족층의 회피를 막고 참여를 독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평민 부호층에게 새로운 면리제의 임원직은 향권에 참여하거나 부수입을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자리로 인식되었다. 이에 평민층이 면임에 진출하면서 향촌 운영권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다. 19세기 이래 삼정(三政) 운영이 더욱 문란해지고 이 틈을 타서 일부 모리(謀利) 세력이 향임직에 진출하면서 이들에 의한 부정부패도 증가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목민대방(牧民大方)』
  • 오영교, 『조선 후기 향촌 지배 정책 연구』, 혜안, 2001.
  • 김선경, 「조선 후기의 조세 수취와 면·리 운영」,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 김준형, 「조선 후기 면리제의 성격」,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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