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부(通信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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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파견되는 일본 사신들의 공식 사절 여부를 확인하던 증명서.

개설

통신부(通信符)는 조선에 보내던 공식 사절인 일본 사신의 사칭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 정부가 일본에 발급해 주었던 증명서이다. 조선은 왜구를 근절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조·일 무역을 허용하는 등 회유책을 사용하였다. 조선은 1443년(세종 25)에 대마도 도주(島主)인 종씨(宗氏, [소씨])와 계해약조를 맺어 1년에 세견선 50척의 입항을 허용하고, 통신부를 사용하여 무역하도록 하였다. 무역항은 부산포·내포·염포의 삼포에 한정하였으며, 삼포와 수도인 한성에 왜관(倭館)을 두었다.

통신부 제도는 명나라에서 시행하던 것으로 조선에서는 임시로 간간이 발급하기는 하였으나 오래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도서(圖書)·서계(書契)·문인(文引) 등의 문서가 조선·일본 간의 외교 및 무역의 확인서로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그 발급·확인 절차 및 기능 면에서는 통신부와 매우 유사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의 대일 관계는 왜구 문제의 해결에 국가적인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에 왜구 정벌과 함께, 교역을 통하여 그들의 경제적인 요구와 필요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왜구의 노략질을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통교를 목적으로 오는 왜인들이 급증하게 되면서, 조선 정부는 늘어나는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통교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그것은 대체로 통교를 제한하는 규제책인 도서제(圖書制), 포소(浦所)의 제한, 서계·행장(行狀)·문인 제도, 도항자 접대 규정 정비 및 세견선 정약(定約) 등으로 반영되었다.

도서제는 통교상의 공로자나 조선에 복속하기를 희망하는 왜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제도였다. 조선 정부는 엄격하게 선별된 일본인들에게만 통교 증명을 위하여 동인(銅印)을 만들어 주었고, 이를 사자(使者)가 내조(來朝)할 경우 서계에 찍어 증거로 삼았다. 또한 조선 정부는 무역을 규제하기 위하여 개항장을 설치하여 무역을 할 수 있는 포소를 제한하였다. 각종 증명서를 지참하는 것도 주요 요구 사항이었는데, 일본인 통교자가 조선 정부 앞으로 발송하는 일종의 외교문서인 서계, 도항 왜인의 신분과 자격을 확인하기 위한 행장, 도항 확인서인 문인 등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통교자의 도항 회수와 파송하는 세견선의 규모 및 교역량을 직접 통제하였다.

통신부는 이러한 규제책 중 도서와 유사하게 활용되었다. 통신부는 동(銅) 혹은 상아로 만들어졌으며 ‘통신부(通信符)’ 또는 ‘조선통신(朝鮮通信)’ 등의 문자를 새긴 표찰이다. 왜인들이 일본국왕사나 유력 수호(守護, [슈고]), 대명(大名, [다이묘]) 등의 거추사(巨酋使)를 사칭하는 사례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통신부가 언제부터 실시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74년(성종 5) 실정막부(室町幕府, [무로마치 바쿠후])의 요청에 따라 상아로 된 통신부를 10개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제작된 통신부의 체재는 원형으로서 둘레가 4촌 5푼, 원지름이 1촌 5푼이다. 한 면에는 ‘조선통신’이라는 4자가 전자(篆字)로 쓰여 있고, 한 면에는 ‘성화 10년 갑오(成化十年甲午)’라는 6자가 쓰여 있다. 또 부(部)마다 한 면 좌우에 각각 제1부터 제10에 이르는 번호를 썼다.

이 10개의 부신(符信)은 가운데를 쪼개어 오른쪽을 일본 회사(回使)에게 내어 주고, 왼쪽 것은 조선에서 갖고 있으면서 징험(徵驗)을 삼게 하였으므로, 빙문(聘問)하는 일본 사신들은 반드시 부신을 지참하도록 하였다. 곧 조선 정부가 통신부를 일본 통교인들과 나누어 갖고 있다가 입국 시 서로 맞추어 본 뒤에야 교역을 허가하였던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통신부는 일본 모리(毛利) 가문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대내씨(大內氏)에게 증여한 동제(銅製)의 통신부로서 ‘통신부’라는 글자가 전자로 양각되어 있다.

의의

통신부를 활용한 무역 형태는 일본이 명나라와 행하였던 감합(勘合) 무역과 매우 유사하였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 행해진 무역은 조공 무역의 한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 막부가 이를 요청해 받았다는 사실은 조·일 간의 통교가 교린 체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잘 보여 준다.

참고문헌

  • 김병하, 「이조전기의 대일무역 성격」, 『아세아연구』 32, 1968.
  • 이정수, 「15·16세기의 대일무역과 경제변동」, 『부대사학』 22, 1998.
  • 하우봉, 「일본과의 관계」, 『한국사』 22,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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