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문감계(土們勘界)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9세기 말 조선과 청국이 간도의 영유권과 국경의 경계를 결정하기 위하여 진행한 여러 번의 국경회담을 조선 측에서 지칭하는 말.

개설

19세기 말 조선은 청국과 두만강 이북의 간도 영유권 문제로 외교적 회담을 개최하면서 조선 측 책임자로 지목하였던 덕원부사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라고 불렀다. 토문의 경계를 살피는 관리라는 말로 토문강의 발원과 그 지류가 진행되는 방향을 살펴 양국의 국경으로 삼겠다는 말이다. 청국은 토문강을 두만강의 이칭인 도문강(圖們江)의 또 다른 말이라고 주장하여 양국의 동북방 경계를 두만강으로 결정하려고 하였다. 반면 조선은 대내외적 정치적 환경에 따라 주장이 바뀌기는 하였지만, 토문강의 발원과 방향을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이거나 백두산 인근의 토문강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토문감계는 조선 측이 주장하는 국경과 영역의 기준이 되는 물줄기를 기준으로 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라고 본다.

역사적 배경

숙종대 강희제의 명으로 조선과 국경회담에 임한 목극등이 백두산에 오른 뒤 양국의 경계를 비석에 새긴 백두산정계비는 양국의 경계를 정확하게 재단한 결과가 아니었다. 정계비의 내용이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에 이르며[西爲鴨綠, 東爲土門], 분수령상의 돌에 이를 새겨 기록한다[分水嶺上, 勒石爲記].’는 것으로 양국 간의 동서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토문강]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청국의 입장에서 보면 목극등의 결정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양국 간의 국경으로 획정할 것을 ‘토문강’이라고 표기하면서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을 가리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배경은 목극등의 현지 조사가 미비하였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목극등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이 백두산을 기점으로 시작한다고 보고 그 정상 부근에 수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찾은 두만강의 지류인 토문강의 흐름이 애매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 강은 일정 유역에 물이 흐르다 땅 속으로 들어가 물길이 끊어지고, 또다시 얼마 후 물길이 나타나 땅 위로 흐르기를 반복하는 복류천이었다. 목극등은 백두산 동쪽으로 흐르는 수많은 지류들을 모두 조사하지 않고 이것들이 모두 두만강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중에 하나를 수원지로 선택하였다. 그러고는 물줄기가 땅속으로 들어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목책을 쌓아 경계로 삼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목극등이 두만강의 수원(水源)이라고 생각한 지류는 동쪽의 두만강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북쪽의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물줄기였다.

이런 역사지리적 배경으로 19세기 말 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이 청국 지방 정부에 의하여 강제로 청국인화 하라는 압박과 인명과 재산상 위협을 받았을 때 조선은 간도의 영유권이 역사적으로 조선에 있으며, 그 증거로 백두산정계비의 비문을 제시하였다. 당시 서북경략사였던 어윤중이 수하였던 김우식을 시켜 백두산과 그 인근을 답사하게 하고 지역민의 여론을 수집한 결과 간도가 조선 영토이며,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백두산정계비라고 확신하였다. 또한 정계비의 내용 중에서 토문강의 소재가 문제 해결의 중심임을 간파한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청국과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토문감계사를 파견하였다.

발단

어윤중은 1882년 10월 청나라와 통상 장정(通商章程)의 타결과 서북 각 읍의 암행 및 서북 국경의 답사, 감계(勘界)의 사명을 받고 서북경략사로 두만강 유역 열읍(列邑)을 순시 중에 있었다. 어윤중은 김우식의 답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로 간도 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였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 조사에 의하여 국경을 획정할 것을 청나라의 현지 관료에게 제기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청국의 조선인 쇄환 압력과 어윤중의 보고와 건의에 따라 청나라 정부에 변계(邊界) 조사에 대한 자문(咨文)을 보냈으나 오히려 1885년 4월에 청나라의 혼춘 당국이 함경도안무사(咸慶道按撫使)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들을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대하여 토문감계(土門勘界)를 다시금 요청하였으며, 이 요청에 따라 마침내 청나라가 응하게 되어 양국 간에 감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국 간에 처음 간도 문제는 월경인을 처리하는 현지 관료들의 행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다가 결국 양국의 강계(疆界)를 조사하는 외교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과

조선과 청국은 1885년(고종 22) 을유감계와 1887년(고종 24)의 정해감계를 거행하여 양국의 의견을 논의하지만, 양측의 주장만 강조할 뿐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청국은 정계비의 비문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조선은 두만강 강원을 토문강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회담은 양측 위원이 조사한 보고서를 인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제3차 감계를 진행하지만, 청일전쟁(1894년)을 거치면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다가 1909년 당사자인 조선이 빠진 채 일본과 청국 간에 간도협약을 맺으며, 간도의 소유권을 청국이 차지하면서 감계의 결말이 났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감계사등록(勘界使謄錄)』
  •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北輿要選』(상), 「백두도본고(白頭圖本攷)」, 경문사, 1976.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1, 동북아역사재단, 2008.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2, 동북아역사재단,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