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궁(太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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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후원 동쪽 담장에 인접한 궁가(宮家).

개설

태화궁의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며, 1899년(고종 26)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고종이 육영공원의 학도들에게 시강을 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고종실록』 26년 5월 23일). 1895년(고종 32) 10월 춘생문(春生門) 사건 당시에는 이곳에 군대가 주둔하였다(『고종실록』 32년 11월 14일).

위치 및 용도

경복궁 후원의 동쪽 출입문인 춘양문(春陽門)과 담장이 연결되고 북동쪽에 있었던 궁가이다. 현재는 삼청동 총리 공관을 포함하여 그 북쪽 일대이다. 19세기까지 이곳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었으며 유일하게 18세기의 지도인 호암미술관 소장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 태백성(太白星)을 제사지내는 제성단(祭星壇)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고종대에 경복궁 후원을 조성하면서 이 일대에 태화궁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및 현황

태화궁은 고종이 갑신정변 이후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한 뒤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1889년(고종 26) 고종은 근대적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의 학생들을 직접 시험[試講] 보았는데, 첫날은 경복궁 만경전(萬慶殿)에서, 둘째 날과 셋째 날은 태화궁에서 하였다. 왕이 주관하는 시험이니 만큼 그만한 행사를 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92년(고종 29)과 1893년(고종 30)에 왕이 종묘와 대보단(大報壇)에 참배하러 갈 때 광화문(光化門)을 나서서 큰길을 이용하지 않고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후원의 동쪽 문인 춘생문으로 나가 태화궁 앞을 지나 창덕궁을 거쳐 종묘의 북장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이용하였다. 이는 왕의 행차를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북장문은 종묘와 창경궁의 경계에 있는 문이다. 위의 행차 경로에서 왕은 태화궁에서 여(輿)에서 내려 대내(大內)로 들었다고 하였으므로 경복궁에 인접해 있으며 태화궁도 궁궐과 같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 일대는 삼청동 일대였는데, 대원군의 사위이자 이완용의 서형(庶兄) 이윤용(李允用)의 아들과 친일파 송병준(宋秉畯)의 소유였다. 1961년부터 이곳은 국무총리 공관이 되었으며 경역 내에는 수령 300년가량의 측백나무와 수령 750~900년의 등나무가 있다. ‘사병(似屛)’, ‘안득불애(安得不愛)’, ‘강청대(康淸臺)’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벽도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던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을 지키는 금군(禁軍)이 태화궁에 주둔해 있다가 춘생문을 통하여 궐내에 진입하였다. 같은 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던 춘생문 사건 때에 시종(侍從) 임최수(林最洙), 참령(參領)이도철(李道徹) 등이 훈련원(訓鍊院)에서 군사를 모아 태화궁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춘생문을 통해 궐내로 진입하려다가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안경수(安駉壽)와 친위대(親衛隊) 대대장(大隊長)이진호(李軫鎬)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이때 궁궐에 진입하려던 군사들은 태화궁에 모여 춘생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태화궁 북쪽 담장에서 경복궁 후원으로 담장을 넘어 들어가려고 시도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통령경호실 편,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 대통령경호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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