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공(漆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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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 옻칠을 전문업으로 하는 기술자.

개설

칠기는 본래 고급의 도장(塗裝)이었으며 신라 직제에 칠전(漆典)을 둘 만큼 요긴하고 사치한 것이었다. 칠기에는 금은 판(板)을 오려서 무늬로 부착시키거나 금분(金粉)을 뿌려 회화적 표현을 하고 혹은 자개를 첨가하여 시문(施紋)하기도 하였는데, 고려와 조선시대의 칠공예는 중국에서 성행한 칠을 반복해서 여러 번 칠한 후에 문양을 새겨 넣는 조칠(彫漆) 기법은 도입하지 않았다.

칠 원료의 확보를 위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적으로 옻나무를 심은 칠전(漆田)을 권장하여 식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풍족한 양의 칠을 확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품질이 낮은 옻나무를 잘라 불에 쬐어가며 채취하는 화칠(火漆)은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민수용(民需用) 제품에 흔히 쓰이고, 양질의 살아 있는 옻나무에서 채취하여 칠하는 생칠(生漆)은 낭비가 없도록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

담당 직무

목칠 공예 분야의 기술자인 칠공은 조선시대 공예 생산자의 주역이었던 경공장(京工匠)외공장(外工匠)에 소속되어 왕실과 관수용(官需用) 물품을 제작하였다.

변천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등록된 자들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부역 체계에 따라 사역한 이후에는 사사로이 작업하여 민간에 제품을 판매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부호들의 부름을 받아 방문하여 작업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즉 1469년(예종 1) 박중선이 칠장(漆工)에게 자신의 집에서 깨진 그릇을 고쳐 만들도록 했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예종실록』 1년 10월 19일).

질적인 면에서 조선전기에는 등록된 장인들의 수준이 시대를 대표할 만하였겠지만, 조선후기에는 시장에 상품을 내놓는 자들의 기술 역시 매우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지역 특산물이 생성되는 것은 기술의 우위에 의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강만길,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창비, 198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