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공장(外工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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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방 관청에 소속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의 제작을 담당하는 장인.

개설

외공장(外工匠)은 지방에 거주하기 때문에 향공장(鄕工匠)이나 외방(外方) 장인이라고도 불렸다. 지방관청에 소속되어 있으나 1년 내내 관청에 얽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수공업자로서 1년의 일정 기간만 공역을 수행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사적인 생산을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외공장은 총 27종목에 3,656명이 등록되어 있었다. 이들 외공장도 경공장과 마찬가지로 지방관청에 명단[匠籍]에 올라있어 반농반공의 민간 수공업자로서 제품을 생산하다가, 지방관아에 일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동원되었다. 지방관아에서 공장을 동원할 때는 감영·군·현·수영·병영 등 관청 자체의 수요품과 공물 및 진상품 등을 마련할 경우이다.

외공장은 전국 5개 도, 350개 군현에 거의 빠짐없이 배치되어 있고, 그 인원수도 상당히 많다. 이로 미루어 외공장의 작업 방식은 경공장과 달리 분업화 내지 전문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담당 직무

27종 3,656명의 외공장은 8개 지방에 분속되어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료로 특산품을 제작하여 공납하였다. 외공장은 지방에서 산출되는 재료로 다음과 같은 특산물을 제작하는 신역(身役)을 졌다. 그중 100명 이상의 인원수가 분포된 장인의 직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장(紙匠)은 조공용이나 인쇄용의 종이를 생산하였다. 종이를 만드는 지장(紙匠)으로 5개 도에 총 722명이 소속되어 전체 외공장의 19.1%에 해당되었다. 종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내내 중국에 조공품으로 보내던 대표적인 물품이었다. 이를 위해 고려시대에는 각 지방에 지소(紙所)를 운영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이것을 개편하고 지방관아에 외공장인 지장을 소속시켜 마련토록 한 것이다.

둘째, 야장(冶匠)은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각종 연장을 생산하였다. 쇠를 두드려 호미·낫·괭이 등을 제작하는 대장장이[冶匠]는 462명으로서 전체 외공장의 12.7%였다.

셋째, 석장(席匠)은 중국에 보내는 조공용이나 궁궐 등지에 사용할 돗자리를 만들어 공납하였다. 신라시대부터 소민(所民)들이 돗자리를 제작하였으며,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지방의 각 소에서 생산하였다. 더욱이 고려 때부터 화문석이 중국에 조공품으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넷째, 군사용 무기인 활·화살과 갑옷 등을 제작하였다. 외공장으로서 활을 만드는 궁장(弓人) 255명, 화살을 만드는 시인(矢人) 350명, 가죽 제품을 만드는 피장(皮匠) 313명이 각 도에 소속되어 병장기를 만들었다.

다섯째, 목장(木匠)은 관아나 건물을 짓는 일을 하였다. 목장 340명은 전체 외공장 중 9.3%이며, 경기 37명, 충청 56명, 경상 66명, 전라 59명, 강원 28명, 황해 26명, 영안 22명, 평안 43명이었다.

여섯째, 사기장(沙器匠)은 도자기 그릇을 제작하는 일을 하였다. 사기장 99명은 사옹원의 분원이 있던 경기에 6명, 충청 22명, 경상 32명, 전라 39명이 있었다. 사옹원 소속 사기장 380명이 경공장 중 단일 장색으로 가장 인원수가 많아 왕실용 그릇을 제작했던 것과 비교된다.

수세

조선시대 외공장에 대한 징세는 수철장·유철장·주절장 등 전업적 수공업자에 한하였다. 수철장의 경우 1425년(세종 7)에 대장간의 규모에 따라 세율을 정하였다. 당시 대·중·소의 구분의 직공의 숫자에 따라 대는 20명 이상, 중은 15명 이상, 소는 14명 이하로 구분하였다(『세종실록』 7년 9월 2일). 규모가 큰 경상도와 전라도는 연간 춘추 2회에, 나머지는 연 1회 납세하게 하였다. 납세는 동전·미곡·철물 등이었다. 이후 외공장에 대한 공장세(工匠稅)는 몇 차례 개정이 있었지만 큰 변화가 없었다. 곧 봄에는 면포로 공장세를 수납하였고, 가을에는 미곡으로 이를 수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변천

봉건 국가에서는 왕실이나 귀족의 생활에 필요한 지방 특산품을 수급하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지방 관서에 장인 조직을 두어 운영하였다. 신라시대 이래의 특수 수공업 지역인 소의 소민들이 지방 특산물을 제작하여 공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실 및 중앙 관서, 그리고 귀족들에게 필요한 물품 및 중국의 조공용으로 사용할 물품을 외공장에서 수취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관영 수공업이 보다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됨에 따라 외공장 도 고려시대보다 다종다양해졌고 조직화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외공장의 종류는 총 27종이다.

전업적 수공업자인 경공장에 비하여 외공장은 야장 등 일부 공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농업을 겸영하였으며, 이들은 대개 농한기에 일정 기간 공역하게 하였다. 예컨대 지방의 군기 제조 공장들은 농사철에는 귀농시키고 한 농기에만 사역시키도록 하여 군기 및 농기 제조와 더불어 농사도 지을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수요와는 관계없이 주로 군기 제조나 진상품 제조 또는 관서의 공업적 노동을 위하여 징발되었을 뿐이다. 한편 그들의 주업이 농업이었으므로 기술이 점차 퇴보하여 진상품을 제작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지방 관리들은 방물을 서울에서 사서 바치거나 혹은 경공장에 그 제조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초부터 외공장은 공장미(工匠米), 공장포(工匠布)의 납부자로 변신하였고, 지방의 관영 수공업도 경공장처럼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당시의 지방 공장들은 농업을 경영하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을 정도였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들어서 외공장은 경공장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독립 수공업자로서 국역에는 임금을 받는 모군(募軍)으로 모집되어 들어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유롭게 지방의 여러 시장을 대상으로 상품을 제작하여 판매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강만길,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한길사, 1984.
  • 송찬식, 『이조 후기 수공업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 유교성, 『한국 상공업사』, 한국문화사대계 2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5.
  • 김신웅, 「조선시대의 경공장과 외공장의 관계」, 『산업경제연구』 12권 1호, 1989.
  • 김신웅, 「호서지방의 외공장과 향시의 관계」, 『산업경제연구』 12권 1호, 1989.
  • 서명희, 「고려시대 철소에 대한 연구」, 『한국사연구』 69,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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