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건(崔孝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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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8년(선조 41)∼1681년(숙종 7)= 74세]. 조선 중기 현종 때의 시인(詩人). 행직(行職)은 부평부사(富平府使)이다. 자는 성허(聖許), 호는 하산(何山)이다. 본관은 수원(水原),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으로 주거지는 경기도 양주(楊州)다. 아버지는 최상고(崔尙古)이고, 어머니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조기(趙琦)의 딸이다.

현종 시대 활동

1644년(인조 22) 37세로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호란이 끝난 다음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평화로운 시대에 연줄을 잘 타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남과 타협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벼슬은 크게 영달하지 못하였다.

1664년(현종 5) 11월 안산군수(安山郡守)로 있을 때 현종이 전국에 구언(求言)하는 전지(傳旨)를 내렸는데,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시정(時政)의 잘잘못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그 중에서 현종이 최효건의 상소를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현종이 최효건에게 친히 비답(批答)하고 그 상소문을 비국(備局)에 내려주어 시행하게 하였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참고.) 그 상소문을 보면, 먼저 임금이 갖추어야 할 덕목(德目) 중에 ‘지(知)·인(仁)·용(勇)’의 3 가지 달덕(達德)을 논하고, 또 시정의 폐단 5조목을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재상(宰相), 둘째는 간관(諫官), 셋째는 인재(人才), 넷째는 민곤(民困: 민간 피폐), 다섯째는 청탁(請托)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민간의 피폐에 대해 진달하면서 대동법(大同法)사창(社倉)의 곡식과 군사의 정원과 궁가(宮家)시장(柴場)에 대한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문장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서 현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바로 그달 경기좌도에 파견된 암행어사(暗行御使)신후재(申厚載)가 경기도 수령으로서 고을을 잘 다스리지 못한 수원 부사이정기(李廷夔) 등 7명을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였는데, 그 중에 최효건도 포함되었다. 임금이 구언에서 으뜸으로 뽑은 수령을 곧바로 암행어사가 처벌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라고 생각된다.

1670년(현종 11) 윤2월 부평부사(富平府使)에 재임할 때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후징(李厚徵)이, “부평부사최효건이 그 고을에 사는 사인(士人) 정재빈(鄭載賓)을 위하여 그 친족 사람이 소유한 전토를 빼앗아 주었습니다. 최효건이 사정(私情)에 따르고 직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며 그의 파직을 청하였으나, 현종이 따르지 않았다. 사인 정재빈은 사헌부 장령(掌令)정시성(鄭始成)의 아들이었으므로 장령정시성도 상소하여 피혐(避嫌)하면서 지평이후징을 공격하였다. 지평이후징이 다시 상소하여 최효건을 탄핵하니, 현종이 먼저 최효건을 파직시킨 뒤에 죄를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이후징이 탄핵한 상소 안에 언서(諺書)를 베껴서 쓴 글이 너무 외람되고 난잡스러웠다.(『현종개수실록』 참고.) 이는 당파가 다른 대관(臺官)들이 서로 헐뜯고 싸우는 와중에 최효건도 함께 휘말려 들어간 사건이었다. 그 뒤에 그는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에 은거(隱居)하여 살면서 시작(詩作)에만 열중하다가, 1681년(숙종 7)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74세였다.

『하산집(何山集)』의 발간

최효건은 문장과 시에 뛰어났는데, 그의 문장은 아주 예리하고 기발한 점이 많았고, 시는 운률(韻律)이 절묘하여 보통 사람들은 그 음운(音韻)을 감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가 살았을 때는 그와 교제한 문인(文人)과 명류(名流)들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추천해 주는 사람도 없어서 그의 명망(名望)이 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그의 시문(詩文)이 알려지면서, 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은 그를 당(唐)나라 ‘두보(杜甫)’와 같은 대시인이라고 극찬하였다. 그 집안이 가난하고 제자들도 없어서 그의 유고(遺稿)는 간행되지 못한 채 후손들이 그대로 간직하였다. 그 뒤에 50여 년만에 그의 증손자 철경(哲卿) 최치성(崔致珹)이 그 유고(遺稿)를 편집하고, 김창흡의 서문(序文)을 붙여서, 문집 『하산집(何山集)』을 발간하였다.(김창집의 『하산집』「서」 참고.)

김창흡은 『하산집』의 서문에서, “우리 동방(東方)의 시(詩)의 연원(淵源)은 얕아서 헌장(憲章)을 더 논할 만한 것이 못되나, 오로지 그 기휘(忌諱)에 철저하고 인습(因襲)에 젖어서, 이는 실로 조선조 3백 년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그러나 선조 이전은 비록 절묘하고 옹졸함은 있으나 그래도 각각 그 본색을 드러냈으나, 그 후 점점 품위가 있게 되면서, 연마와 수식(修飾)이 날로 성해지고 기휘가 더욱 심해지며, 인습이 더욱 깊어지니, 옛 것을 본뜨는 것도 아니면서 마침내 법에만 얽매었던 것이다.” 하고, 조선조 전기 3백여 년 동안 시는 인습에 젖어서 격식(格式)에 얽매이고 수식에만 치우쳐서 시의 본질(本質)을 망각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또 김창흡은 그 서문에서 주장하기를, “나는 우리나라의 시가 이와 같이 법에 얽매이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뒤늦게 하산(何山)의 시를 얻어서 읽어보니, 이 시는 진정 기휘(忌諱)에서 벗어나고 인습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체(體)와 격(格)을 보면, 중국 당나라 송(宋)나라의 체와 격이 아니고, 또 스승으로부터 이어 받은 것도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성조(聲調)가 해맑고 기기(氣機)가 드넓으며, 때때로 갑자기 다가와 험하고 기이함을 만들어 내고, 갑자기 냉수를 등에 퍼붓고 번개가 눈에 번쩍이는 것 같아서, 거의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을 흔들고 정신을 빼앗는 것 같았다. 천천히 연역(演繹)해 보면, 갖가지 경지(境地)가 모두 백태(百態)를 연출하니, 놀랍고도 기뻐서 저절로 입이 벌어지며, 손뼉을 친 지 오래이다.”라고 하였다. 곧 최효건의 시가 중국의 당송(唐宋) 시가(詩歌)를 본뜬 것도 아니고, 스승으로부터 배운 조선의 전통 시가도 아닌데도, 성조가 맑고 기법(技法)이 신묘(神妙)하여,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서, 저절로 손뼉을 치게 만든다고 극찬한 것이다.

성품과 일화

최효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곧고 날카로와서 남과 화동(和同)하지 못하고, 언제나 외톨이로 지냈다. 남들처럼 스승을 찾아가서 배우지도 않고 친구들과 사귀지도 않았다. 혼자서 글을 읽고 그 글의 뜻을 깨닫고, 다시 그 생각을 글로써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의 글은 독창적인 영역를 개척하여, 그의 시가 조선 후기 최고의 걸작이 될 수 있었다.

1664년(현종 5) 그가 안산군수로 있을 때 현종의 구언에 응하여 상소한 글을 보면, “공자가 애공(哀公)을 만났을 때 애공이 정치에 대해서 물으니, ‘지·인·용’의 3 가지 달덕으로 말하였습니다. ‘지(知)’란 만물에 두루 통하여, 하는 일마다 이치에 맞는 것인데,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불세출의 지혜가 없으면 비상한 재주를 가진 인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인(仁)’이란 널리 은혜를 베풀어 사람들을 구제하되, 친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소원한 데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제거하기 어려운 것은 사사로움입니다. ‘용(勇)’이란 분발하고 강건하고 강인하고 굳세어 일에 임하여 단호히 결정하되, 의(義)를 으뜸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였다. 여기서 그가 문장을 구사하는 데에도 지극히 논리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의 상소문에서 민곤에 대하여 논하기를, “대동법을 새로 시행하는데, 전지(田地)의 조세(租稅)가 전보다 몇 배나 많은데다가 때 아닌 부역이 있으므로 연호(烟戶)의 고통이 많습니다. 사창(社倉)의 곡식은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화도(江華島)에 쌓아둔 곡식이 몇 십만 석이나 되는데도 해마다 장리(長利)를 놓아서 백성들의 살갗을 벗기고 골수를 뽑아갑니다. 군사의 액수(額數)는 나라를 보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각각 아문(衙門)을 설치하여 갖가지로 군사를 색출하여 정원이 빠지는 대로 채워 넣으므로, 양민(良民)들이 모두 없어지며, 아이들마저 어미젖을 떼자마자 군졸로 편입됩니다. 그리고 궁벽한 산골짜기는 반 정도가 궁가의 시장이 되었으며, 강이나 바닷가의 평지는 모두 다 종친(宗親)들이 이익을 노리는 땅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초목을 자라게 하는데도 백성들이 손을 대지 못하고, 땅이 어염(魚鹽)을 내는데도 이익은 세력 있는 자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사방에서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하늘에 하소연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하였다. 이 글을 보면, 최효건이 현실의 질고(疾苦)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하산집(何山集)』
  • 『삼연집(三淵集)』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순암집(醇庵集)』
  • 『기봉집(騏峯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