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진(靑山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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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청산도(靑山島)에 해변 방어를 위해 설치한 진영(鎭營).

개설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에 해변 방어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설치한 진이다. 원래 ‘진(鎭)’은 보통 군사들의 둔영(屯營)을 의미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진관체제(鎭管體制)에 기반하여 군사적 요새지와 요충지는 물론 수령이 있는 지방의 여러 읍(邑)까지도 모두 ‘진’으로 불렀다. ‘진’은 절도사(節度使)가 있는 주진(主鎭), 절제사(節制使)와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있는 거진(巨鎭), 첨절제사(同僉節制使)·만호(萬戶)·도위(都尉)가 있는 제진(諸鎭) 등 크게 3가지 형태로 구분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제작되었던 『호남진지(湖南鎭誌)』는 총 3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책에는 흑산진(黑山鎭)·거문진(巨文鎭)·청산진(靑山鎭)·삼도진(三島鎭)을 비롯한 모두 10개의 진영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 구성은 각 진지에 관한 내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주로 각 진의 위치·설치 연혁·방리·인구·토지·시설·군병·군기·재정 구조 등을 기록해두었다. 이 자료를 통해 조선말기 해남 지역 진지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청산진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다. 청산진의 경우 위치·설치 연혁·진관(鎭管)·면적·강계(疆界)·면질(面秩)·호구질(戶口秩)·소산(所産)·풍속(風俗)·토리(土理)·영애(嶺阨)·고적(古蹟)·성첩(城堞)·봉수(烽燧)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변천 및 현황

청산진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비변사등록』이다. 『비변사등록』 1866년(고종 3) 10월의 기록에 따르면 의정부에서 청산도에 이미 진영이 설치되어 있지만 흥양(興陽)의 3도(島)와 영암(靈巖)의 소안도(所安島)를 청산진에 부속시키면서 편제 개편의 필요성을 설명하자 국왕이 이를 윤허하면서 청산진의 규모가 확장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기록을 통해 전라도 지역에 이미 청산진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종대 초반의 기록이라는 점을 통해 청산진의 설치 시기는 고종 즉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이 병인양요(丙寅洋擾)를 겪고 있던 시기인 만큼 해변 방어 체제의 강화와 정비의 필요성을 인식한 데 따른 조치라고 판단된다.

1874년(고종 11)에는 삼군부(三軍府)에서 청산진에 포군(砲軍) 50명, 무사(武士) 100명, 별포사(別砲士) 30명 등 모두 180명을 새로 설치하였다는 보고 내용이 확인된다(『고종실록』 11년 1월 21일).

『비변사등록』 1875년(고종 12) 12월의 기록에서는 의정부가 전라좌도암행어사여규익(呂圭益)의 보고에 따라 평일도(平日島)와 산일도(山日島) 두 섬을 청산진에 소속시켜주도록 요청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여규익의 건의는 해당 지역 백성들의 요청을 전달한 것으로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평일도와 산일도를 청산진 소속이 되도록 조치했다. 또한 『비변사등록』 1887년(고종 24) 12월의 기록에는 의정부가 거문진(巨文鎭) 소속 관리들의 평가와 군제(軍制)를 청산진의 예에 따라 정하도록 건의해 국왕의 윤허를 받았던 내용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당시 청산진의 운영과 군제가 다른 진지들의 운영에 기준이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동지지(大東地志)』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남진지(湖南鎭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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