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간(鐵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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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장(鐵場)에서 철을 채굴하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신분.

개설

조선전기 철장제(鐵場制) 혹은 철장도회제(鐵場都會制)에서 공물로 납부할 공철(貢鐵)을 채납(採納)하는 철장역(鐵場役)에 동원된 사람들을 철간(鐵干)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본래 양인 신분이나 천민이 하는 철장역을 담당하여 신량역천 신분으로 분류되었다.

담당 직무

철장에서 오로지 철을 다루는 일에만 전념하는 철장역을 담당한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염철법에 따라 선공감과 군기시에 공철을 수납하였고 혹은 철장도회제 아래에서 생산된 철물은 각 도의 계수관과 영진의 무기제조장에 공급되었다. 그러나 시행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자 1407년(태종 7)에 이를 모두 혁파하고 철장을 증설하여 춘추의 농한기에 인근 농민들을 철장에 동원하여 선공감과 군기감의 공철을 채납하도록 하는 철장도회제를 시행하였다.

감야관(監冶官)의 감독 아래 철장역에 동원된 인부들은 본읍과 인근의 여러 읍에서 징발한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전에는 다른 역은 대부분 면제해주고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해주어 오로지 철만 다루도록 하여 땔나무가 무성할 때에는 철의 제련을 쉽게 할 수 있었으나 구분전이 군용으로 전용되면서 땔나무가 사라지자 철간은 이제 일반 농민과 다름없이 농사에 종사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철의 부담은 사라지지 않으면서 일반 농민의 예와 같이 일반 요역에 징발되자 폐해가 적지 않았다. 철간이 공납하던 수량을 실제 철이 산출되는 읍에 나누어 책정하고 철간을 군역으로 정해 보내는 임시대책도 마련되었으나 폐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조정의 무절제한 착취와 철장도회제 운영의 결함으로 세종대에 이르면 철장역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피역 현상은 심해졌고 대납행위도 성행하면서 세조대에 이르면 철장도회제를 폐지하고 현물이나 미곡 대납으로 전환되었다. 성종대에 이르면 임토작공의 원칙에 따라 철광을 보유한 읍에만 부과되는 각읍채납제(各邑採納制)가 적용되었고 매년 춘추의 농한기에 일반 백성이 철장에 부역되었다.

참고문헌

  • 유승주, 『조선시대 광업사연구』, 고려대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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