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홍사(採紅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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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연산군 10)~1506년까지 연산군에게 바칠 미녀를 뽑기 위해 전국에 파견된 임시 관원.

개설

채홍사(採紅使)는 1504년의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이 미녀를 뽑기 위해 전국에 파견한 임시 관원이다. 『연산군일기』에는 미녀와 함께 좋은 말을 징발하려는 목적의 채홍준사(採紅駿使)라는 명칭이 좀 더 많이 나온다. 채홍사는 연산군 때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연산군의 폭정과 황음(荒淫)이 극도로 치달은 1504~1506년에 한정되어 운영된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관직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연산군의 폭정은 갑자사화를 일으킨 뒤 더욱 심각해졌다. 황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기녀의 숫자와 조직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었다.

우선 장악원에 소속된 기녀의 숫자가 기존의 두 배인 300명으로 늘었다(『연산군일기』 10년 10월 1일). 두 달 뒤에는 흥청(興淸)·운평(運平)·광희(廣熙)라는 이름을 가진 기녀 조직이 새로 만들어졌다. 가장 서열이 높은 흥청은 ‘사악한 더러움을 깨끗이 씻는다[蕩滌邪穢].’는 뜻이고 운평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運際太平].’는 의미였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22일). 흥청은 왕과 동침한 천과(天科)와 그렇지 못한 지과(地科), 동침했으되 만족스럽지 못한 반천과(半天科)로 다시 세분되었으며, 흥청과 운평 사이에는 가흥청(假興淸)이라는 중간 단계가 있었다.

흥청은 300명, 운평은 700명, 광희는 1천 명이 선발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24일), (『연산군일기』 10년 12월 30일). 운평의 정원은 한 달 만에 1천 명으로 늘어나(『연산군일기』 11년 1월 27일) 전국의 모든 고을에 배정되었으며, 곧 300명을 더 선발했다(『연산군일기』 11년 8월 15일), (『연산군일기』 12년 2월 14일).

2년 뒤에는 운평 1,000명을 더 선발해 계평(繼平)이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었으며 채홍(採紅)·속홍(續紅)·부화(赴和)·흡려(洽黎) 같은 집단도 추가로 생겨났다(『연산군일기』 12년 2월 19일), (『연산군일기』 12년 9월 2일). 이들은 원래 천한 신분인 기녀였지만 점차 후궁이나 궁인 즉, 나인과 동일한 지위로 격상되었다(『연산군일기』 12년 9월 2일).

이렇게 급증한 기녀의 정원을 모두 채우는 것은 당연히 매우 어려웠다. 연산군이 제시한 선발 기준은 자색(姿色)이 있고 음률(音律)을 알며 호기(豪氣)가 있는 여성이었다(『연산군일기』 11년 9월 18일). 운평과 광희는 정원을 거의 채웠지만, 선발 기준이 가장 엄격한 흥청은 300명 중 93명밖에 뽑지 못했다(『연산군일기』 11년 4월 4일).

채홍사 등으로서 파견되어 좋은 성과를 올린 자에게는 관직을 올려주고 토지와 노비를 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채홍사 등은 공을 탐하여 경쟁과 불법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한편 흥청·운평·광희 등에는 기녀는 물론 양가 처녀도 징발하였는데, 선발된 양가 처녀의 집에는 봉족과 잡역을 면제해주었다.

조직 및 역할

채홍사는 이런 수많은 기녀를 충당하기 위해 전국으로 파견된 임시 관원이었다. 채홍사 이외에도 수시로 채청여사(採靑女使), 채홍준체찰사(採紅駿體察使), 채홍준순찰사(採紅駿巡察使), 채홍준종사관(採紅駿從事官) 등이 파견되어 여색과 준마를 징발하였다. 채홍사 등은 왕의 엽색(獵色) 행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례적 관직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조직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채홍사 이계동(李季同)·임숭재(任崇載)·임사홍(任士洪) 등이 평안도·황해도 등에 파견된 기록이 보인다(『연산군일기』 11년 6월 16일), (『연산군일기』 11년 9월 18일). 이들의 관직을 보면 임사홍과 임숭재는 부자인데 종1품 이조 판서와 정1품 부마이고, 이계동은 정1품 영중추부사인데, 그 모두는 연산군의 총신이다. 또 채홍준체찰사 등에 보이는 체찰사·순찰사는 정1~종2품관이 외방사신으로 출사할 때 제수된 관직이고, 종사관은 당하관 이하가 제수되어 체찰사 등과 같이 파견되어 그에 부여된 실무를 총괄하는 관직이다. 이로 볼 때 채홍사 등에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정1~종2품관과 그를 보좌하는 당하관 이하인 종사관이 함께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채홍사는 갑자사화 이후 파견되기 시작해 연산군이 폐위된 뒤에는 기록에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연산군의 폐출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김범,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2010.
  • 권민정, 「연산조의 여악(女樂)에 대한 고찰」, 『한국음악학논집』 1, 1990.
  • 조광국, 「16세기 초엽 기녀제도 개편 양상-연산군 시대를 중심으로」, 『규장각』 23,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