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우(倡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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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춤, 연기, 재담 등을 직업으로 삼았던 민간 예능인.

개설

창우(倡優)는 노래, 춤, 연기, 재담 등의 놀이를 공연했던 민간의 전문 예능인을 일컫는다. 이들은 광대, 재인(才人), 우인(優人), 배우(俳優), 정재인(呈才人), 영인(伶人), 희자(戱子), 창부(倡夫), 창부(唱夫)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특히 노래와 춤에 뛰어났다. 조선후기에는 판소리 광대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신분적으로는 천민에 속하였으며,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존재하였다. 궁중, 관아, 양반 등 다양한 계층의 오락적 수요를 충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천민 출신이었던 창우들은 노래와 춤이 특기였고 익살스러운 연기를 펼치기도 했던 민간의 예능인이다. 기예를 팔아 생활하였는데, 궁중 행사나 지방관아의 행사에 동원되었으며 양반층의 놀이 수요를 채우는 역할도 하였다.

궁중에서 섣달그믐 밤에 악귀를 쫓기 위해 베푸는 나례(儺禮)를 행할 때, 중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왕이 종묘 제사 후 환궁할 때(『광해군일기』 7년 9월 13일), 왕이 성균관에 나아가 공자 사당에 술을 올리는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임시 과거를 베풀어 잘한 자들을 뽑은 후 환궁할 때(『숙종실록』 17년 8월 10일), 지방관아에서 잔치할 때, 과거 급제자가 유가(遊街)할 때 등 여러 행사에 동원되어 재능을 펼쳤다. 때로는 포도청의 군졸로 불려가 복무하기도 하였으니, 포도 군사의 일이 고되어 그 역의 부담자였던 양민들이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창우들은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악공(樂工)이나 정재를 춤추는 여기(女妓)들의 공연에서 감상할 수 없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 점으로 인해 왕의 기분 전환을 위해 불려가거나 궁중과 관아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공식적으로 초청되었는데, 이때 그들은 그 재주를 펼침으로써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였다. 그 대가로 왕에게 물건을 하사받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3년 12월 28일). 하지만 한편에서는 신하들이 창우의 성악이 번잡하고 떠들썩하다며 금하라는 건의를 왕에게 올리기도 하였다(『숙종실록』 13년 9월 21일).

전국에 존재했던 창우들의 자취는 「평양감사향연도(平壤監司饗宴圖)」에 화려한 복식으로 꾸민 채 배위에 서서 춤추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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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림1_00015246_창우(「평양감사향연도」 제7폭)

변천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조선전기에는 민간에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궁중의 수요에 부응하여 왕 앞에서 또는 왕실 행사에서 장기를 펼쳤다. 조선후기에는 판소리를 하는 광대를 일컫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
  • 『지양만록(芝陽漫錄)』
  • 사진실, 『한국연극사 연구』, 태학사, 1997.
  • 사진실, 『공연문화의 전통 -樂·戱·劇-』, 태학사, 2002.
  • 이보형, 「창우집단의 광대소리 연구」, 『한국전통음악논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
  • 이혜구, 「송만재의 관우희」, 『(보정)한국음악연구』, 민속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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