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대군 이방우(鎭安大君 李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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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54년(공민왕 3)~1393년(태조 2) = 40세]. 여말선초 고려 우왕〜조선태조 때 활동한 왕자. 태조이성계(李成桂)의 제 1 왕자. 행직(行職)은 고려 예의 판서(禮儀判書)이고, 봉작(封爵)은 진안대군(鎭安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거주지는 개성, 서울, 함흥이다. 어머니 신의왕후(神懿王后)는 안변한씨(安邊韓氏)한경(韓卿)의 딸이다. 이방과(李芳果), 이방의(李芳毅), 이방간(李芳幹), 이방원(李芳遠), 이방연(李芳衍)이 동복 동생이다.

은거 생활

이방우(李芳雨)는 1354년(공민왕 3) 화주(和州) 곧 함흥에서 태어났다. 이때 그의 할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이 원(元)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천호(千戶)로 있었다. 1388년(우왕 14)까지 고려 조정에 출사하였다. 그런데 아버지 이성계가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에 제수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요동 공벌에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사불가론(四不可論) 곧 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 거국적 원정의 틈을 타서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다는 것, 장마철이라 활이 풀리고 군대 내에 질병이 심할 것 등의 구실을 앞세워 요동을 공략할 수 없다며 군사를 국내로 돌려서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이라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요동정벌을 위해 평양에 와 있던 우왕과 최영(崔瑩)은 개경으로 돌아와, 이성계에 반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왕조가 몰락하고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에 의해 왕조가 바뀌는 거사를 목격하자 이방우는 세상에 숨어 살 뜻으로 가족을 데리고 철원(鐵原)의 보개산(寶蓋山)으로 들어갔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이 성공하자 최영을 고봉현(高峰縣) 곧 고양에 유배보내고, 1388년(우왕 14)에 죽였다. 우왕 또한 강화도로 쫓아내고, 1389년 어린 창왕(昌王)을 세웠다가 다시 재위 1년 만에 강화도로 유배보내 10세 때 죽였다. 다시 이성계는 1389년 공양왕(恭讓王)을 세웠으나 공양왕도 원주로 추방한 후 공양군으로 강등시켰다가 삼척으로 옮겼고 1394년(태조 3) 공양왕 부자와 왕씨를 모두 살해했다. 이방우는 공양왕이 죽기 전에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 은거 생활을 했다. 곧 세속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역성혁명에도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다.

음주 생활

이방우는 아버지 이성계가 고려왕의 명을 어겼다고 생각하여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 이후 1393년(태조 2) 졸할 때까지 은거하면서 음주로 세월을 보냈다. 그 당시 명나라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간고(艱苦)하게 지내고 나라는 부패로 얼룩졌으며 군대는 기강이 해이해진 상태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이런 정황을 고려해 요동 정벌을 나선다면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으로 정벌의 기회를 놓친 셈이 되었다. 야사(野史)에는 이방우가 회군을 극력 반대했다고 한다.

이성계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으로 새 왕조를 세우는 기틀을 마련하고 1392년(태조 1) 왕위에 올랐다. 이때 태조는 여러 왕자를 군으로 봉할 때 이방우도 진안군(鎭安君)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이방우는 태조가 즉위하자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술로 세월을 보냈으니 이는 아버지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임금에 오른 일을 정당한 행위로 보지 않은 데 있다. 태조가 이방우에게 함흥을 떠날 것을 권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이방우가 왕위에 오른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강호에 묻혀 살자, 태조는 그 마음을 꺾지 못하고 전사(田舍)를 마련해 주어 살게 했다. 1393년(태조 2) 12월 13일 병을 앓다가 별세하니 향년 40세였다. 한편, 1398년(태조 7) 왕자에게 공(公)이라 봉작하였고, 1401년(태종 1)에는 작호를 개정하였다. 이때 이방우는 은거하고 있었지만, 다른 왕자들과 같이 진안공(鎭安公), 진안대군(鎭安大君)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효성과 우애

이방우가 졸하자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다.(『태조실록』태조 2년 12월 13일 「이방우 졸기」) 그는 어려서 효자로 칭송되었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고 한다. 효자로서 살았으나 <위화도회군>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과 달리 강호에서 일생을 마쳤다. 조선 후기 문신 매산(梅山)홍직필(洪直弼)의『매산집(梅山集)』을 보면, 그에 관하여 태조의 효자이고[太祖之孝子], 고려 왕조의 착한 신하였다.[麗朝之純臣也]”라고 하여(『매산집』 권9 참고) 효도하는 마음이 지극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또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이방우가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워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경효, 정의(靖懿)이다. 동모형제였던 태종이방원이 1418년(태종18) 3월 진한(辰韓)정효공(定孝公)에 추증(追贈)하였다. 묘소는 본래 함경도 함흥 북원 평사 마내곡에 있었는데, 1408년(태종 8)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황강리 몽상동으로 이장하였다. 청덕사(淸德祀)에 제향되었다.

부인 충주지씨(忠州池氏)는 찬성사(贊成事)지윤(池奫)의 딸로,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태종실록』태종 4년 2월 18일 「제릉 비문」 참고.) 1자는 봉녕군(奉寧君)이복근(李福根)이고, 1녀는 한성부 판사(漢城府判事)이숙묘(李叔畝)의 처가 되었는데, 1413(태종 13) 8월 20일에 다른 종친의 딸들과 함게 옹주(翁主)가 되었다. 2자는 원윤(元尹) 이덕근(李德根)인데, 진안대군의 얼자라고 한다.(『태종실록』태종 12년 4월 25일 「이덕근 졸기」 참고.)

진안대군이방우은 처음 운둔지와 임종한 곳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다.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여 처음으로 은둔한 곳에 대해 강원도 철원 보개산이라고 한다.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에서는 해주(海州)에 은거하다가 사망하여 지청사(至淸祀)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실록』에서는 1789년(정조 13) 2월 함흥에서 개성 풍덕[개풍] 고개(古蓋)로 옮겨왔다고 하였다.(『정조실록』정조 13년 2월 16조 기사 참고.) 이 세 가지 설에 대해 자세히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은둔한 곳은 철원이었다. 『국조인물지』를 참고한 문화재청의 발표에 의하면, “1831년(순조 31) 태조이성계의 첫째 아들인 진안대군이방우와 대군의 장자인 봉녕후(奉寧侯) 이복근의 신위를 지청사에 배향하였다.”라고 하였다. 해주 지청사에서 충청북도 괴산군으로 사우(祠宇)를 옮겨 청덕사로 현판을 붙였다. 이방우가 '유백이지청 태백지덕(有伯夷之淸 太伯之德)'이라 말한 적이 있기에 그 사호(祠號)를 청덕(淸德)이라 하였다. 1990년 12월 24일 문화재청 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청덕사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 385번지에 있다. 장지는『정조실록』의 내용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즉 철원의 은거는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으로, 함흥은 왕위에 오른 후이고, 해주는 잠시 있었던 곳으로 신위가 봉안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선원계보(璿源系譜)』
  • 『목은문고(牧隱文藁)』
  • 『홍재전서(弘齋全書)』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매산집(梅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