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군 이종생(鎭南君 李終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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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6년(태종 6) ~ 1470년(성종 1) = 65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6왕자. 봉작(封爵)은 진남군(鎭南君)이다. 장원서(掌苑署)제조(提調)를 지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이숙의(李淑儀)이다.

세종 시대의 활동

1425년(세종 7) 정윤(正尹)이 되었고, 1430년(세종 12) 원윤(元尹)이 되었다. 1442년(세종 24) 전주(全州)에 살고 있는 이방간(李芳幹)의 첩의 아들 집에 태조(太祖)의 쉬용(晬容)이 있다고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이계린(李季疄)이 아뢰자, 세종은 이종생을 전주로 보내 태조의 쉬용을 모셔오게 하였다. 1443년(세종 25) 어머니 이숙의(李淑儀)의 상을 당하였다. 1444년(세종 26) 정3품상 명선대부(明善大夫) 진남정(鎭南正)이 되었다. 이 해에 세종이 종학(宗學)을 세웠는데, 진남군이종생을 종학의 유사(有司)로 삼아 종실 학생들을 규찰하게 하였다.

문종~단종 시대의 활동

1452년(문종 2) 문종(文宗)이 종실에 학문이 있는 자를 시험하여 강(講)하게 하였는데, 이종생이 경서(經書)의 강론에 모두 능통하였으므로 문종이 이를 가상히 여기어 학생의 신분을 면하게 하고, 또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1453년(단종 1) 7월 종2품상 정의대부(正義大夫) 진남군에 봉해졌다.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그해 10월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종친들은 수양대군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갈리었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다음해 1454년(단종 2) 5월 계유정난의 공신을 비롯하여 4공신과 종친들을 거느리고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풍정(豊呈)을 올렸다. 이때 연회에 참석한 종친들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 온녕군(溫寧君)이정(李䄇),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 등이었는데, 모두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을 도왔거나 지지했던 자들과 수양대군이 회유하려던 자들이었다. 진남군도 이 풍정에 참석한 것을 보면, 계유정난에 대해 적어도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서, 1452년(단종 즉위) 10월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가게 되자, 앞서 언급한 종친들과 함께 진남군도 수양대군을 전별하였다. 이때 양녕대군은 “수양은 천명(天命)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 두 기록을 보면, 진남군은 세조를 도왔거나 지지했던 종친 중 한 사람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세조 시대의 그의 활동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세조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 8월 경서의 대의(大義)에 능통하다고 하여 취학(就學)을 면제받았다. 또 세종의 특명으로 동생 덕천군(德泉君)이후생(李厚生)과 함께 종친의 규례에 따라서, 예궐하여 시위(侍衛)하게 되었다. 임금을 호위하고 신변을 보살피는 시위대(侍衛隊)의 임무를 맡았으니, 이것은 임금인 세조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한다는 뜻이다. 1461년(세조 7) 세조가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주연을 베풀 때 참석하였는데, 그때 다른 대군들과는 달리 임금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1466년(세조 12) 세조는 그를 종실 중에서 최고로 어질다고 칭찬하며 특명으로 사옹원(司饔院)제조(提調)와 장원서 제조로 삼았다. 1467년(세조 13) 4월 자급을 뛰어 올려 정2품상 숭헌대부(崇憲大夫)로 승품되었다. 1470년(성종 1) 11월 27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65세이다.

성품과 일화

『성종실록(成宗實錄)』의 「진남군 이종생 졸기」에서 그의 성품을 보면, “성질이 공손하고 근신하며, 성색(聲色)을 기뻐하지 않고, 자식을 방정(方正)하게 교육하였다.” 고 하였다. 또 그의 시호를 통해서도 그의 성품을 유추할 수 있는데, 그의 시호가 이간(夷簡)은, “마음을 편안히 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것을 이(夷)라 하고, 평이(平易)하고 게으르게 하지 않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또 그의 졸기에서, “그가 장악원과 장원서 두 관부의 제조로 임명된 것은, 그가 종친 중에서 최고로 어질기 때문이었다.”고 하여, 그가 종친 중에서 어진 사람이었다고 한다.[『성종실록』성종 1년 11월 27일 「진남군 이종생 졸기」]

묘소와 후손

시호는 이간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 학당리[『선원록』]로 현 경기도 용인시 역북리 구성동 선산에 있다. 1872년(고종 9)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의령 남씨(宜寧南氏)남심(南深)의 딸인데,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거평군(居平君)이복(李復)이고, 차남은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진례군(進禮君)이형(李衡)이다. 3남은 봉성군(鳳城君)이이(李侇)이고, 4남은 병조 참의(參議)금산군(金山君)이연(李衍)인데, 금산부정(金山副正)일 때 종의군(從義君)이귀생(李貴生)의 양자가 되었다. 1녀는 김승(金昇)의 처가 되었다. 이복은 세조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거평군에 봉해졌고, 예종 때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려서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