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知貢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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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터 조선 건국 초까지 문과 시험을 주관한 최고 시험관.

개설

지공거(知貢擧)는 중국당나라와 송나라 제도에서 유래한 말이다. 지(知)는 주관한다, 공거(貢擧)는 지방 과거(科擧)의 합격자를 선발해서 보낸다는 말로 전국에서 뽑혀 올라온 선비를 시험 본다는 의미이다. 고려 때인 958년 쌍기(雙冀)의 건의로 시행한 첫 과거 시험부터 그 실시를 지휘하다가 조선초기에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지공거는 부시험관인 동지공거(同知貢擧) 이하를 지휘하면서 과거를 진행하고 응시자가 제출한 시험지를 채점하여 합격 여부를 결정하고 등급을 정하였다. 최초의 지공거로는 문관 1명을 임명했으나, 972년 과거 응시생이 증가하자 지공거를 보좌하기 위한 부시험관인 동지공거를 두었다. 동지공거는 이후 폐지와 복치를 거듭하다가 1083년 문종대의 대대적인 관제 정비에 수반되어 1명으로 확정되었다. 지공거는 특별한 임무 규정이 없었으나 대개 3·4품의 문신으로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 사람을 임명했다.

과거가 실시된 초기에는 쌍기, 왕융(王融) 등 귀화한 한인(漢人) 출신 한림학사들이 많이 임명되었다. 이 영향으로 고려시대에는 지공거를 학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융은 11번이나 역임했다. 이것은 과거가 공신(功臣), 세가 대신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의 친위 세력을 양성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변천

지공거는 처음에는 3품 이하의 관인이 임명되었으나 성종대 이후 고려전기를 통해 학식이 뛰어난 문하시중 이하 재상이 임명되었고, 동지공거에도 학식이 뛰어난 찬성사 이하 재상이 임명되었다. 한편 고려전기에는 유학의 발달과 함께 문풍이 진작되고, 이에 토대하여 귀족 사회가 융성하였다. 이에 따라 지공거는 그 권위가 높아지고 재상과 관인들이 선망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무신 정권과 원 간섭기에 이르러 지공거의 권위가 크게 떨어지고, 과거도 공정하게 치러지지 못하였다. 지공거에는 여전히 문하시중 이하의 재상이 임명되기는 하였으나 그 면모를 보면 대개가 무능하거나 권신에게 추종하는 사람이었다. 그 위에 지공거는 권세가의 압력을 받거나 그들과 결탁하여 학식이 있는 인물을 제치고 문벌 자제를 뽑는가 하면 합격자를 양산하였다.

고려 명종대부터는 좌주(座主)-문생(門生) 제도가 송나라에서 도입되었다. 좌주는 시험관인 지공거를 의미하며 문생은 그 시험관이 감독할 때 과거에 급제한 합격생을 말한다. 이 제도가 발전하여 좌주-문생의 의례까지 생겼고, 지공거와 합격생 간에는 좌주를 위해 상복을 입을 정도로 평생 동안 지속되는 독특한 관계가 생겼다. 이것이 고려후기 문벌 정치를 낳는 요인이 되었다.

지공거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1315년에 지공거를 폐지하고 고시관 제도를 세웠다. 공민왕대는 왕이 주관하는 전시(殿試)를 시행해서 왕이 최종 시험의 시관(試官)이 됨으로써 지공거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1330년 지공거가 부활했으나 1388년에 다시 고시관 제도로 바뀌었다. 고시관 제도에서는 1명이 주관하는 지공거와 달리 여러 명의 문신을 고시관에 임명했다. 위화도 회군 후에는 고시관의 수를 늘리고 회시(會試) 고시관과 전시 고시관으로 나누어 시관의 권한을 분할·축소시켰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즉위 교서에서 좌주-문생을 폐지했고 이것이 『경제육전』에 수록되었다. 정종 즉위 후에 다시 좌주-문생 제도가 부활했으나 1413년에 지공거와 고시관까지 모두 혁파하고 성균관에서 주관하던 문과를 예조(禮曹)가 주관하게 했다(『태종실록』 13년 1월 6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200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