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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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동족(同族)의 혈연과 계통을 부계 중심으로 기록한 서책.

개설

족보는 동성(同姓) 동본(同本)을 동족으로 인식하고 그 계통을 기록한 책이다. 즉 종적으로는 시조로부터 족보 편찬 당시 동족에 이르기까지 세계(世系)와 횡적으로는 동족 상호의 친소원근(親疎遠近) 관계를 밝혀 놓은 책이다. 이렇듯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며, 족인을 단결하고 소목(昭穆)을 분별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족보는 조선전기에 몇몇 가문에서 편찬한 사실이 있으나 그 전성기는 조선후기이다. 전자가 부계와 모계 양측적(兩側的) 친족 관계에 입각한 가계의 기술이었다면, 후자는 부계 중심의 친족 구조에 입각한 가계의 기술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족보는 혈통과 가격(家格)을 증빙하는 자료이다. 신분 사회에서 성(姓)과 본관(本貫)은 응시(應試)·출사(出仕)·승음(承蔭) 및 혼인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는 호구단자나 호적대장이 주목되지만, 족보 역시 신분과 자신들의 입지·가격을 증빙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정조실록』 11년 4월 27일).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에 편찬된 족보는 가승(家乘), 파보(派譜), 세보(世譜), 대동보(大同譜) 등으로 대별될 수 있다. 개별적 가계 기록으로서의 가승, 동족이 분파되어 파조(派祖)를 중심으로 가계를 정리한 파보, 상계(上系)를 밝히고 분파 경로 및 각 분파 간의 계통과 분파의 내력을 수록한 세보, 시조로부터 생존하는 자손에 이르기까지를 총망라하여 수록한 대동보 등의 유형이 있는 것이다.

족보 편찬 주체는 문중(門中)종가(宗家)이다. 문중은 족계(族契)의 조직을 넘어서 파문중(派門中)이 형성되고 다시 대문중(大門中)으로 발전하였으며, 종가 역시 파종가(派宗家)가 형성되고 대종가(大宗家)로 발전하였다(『중종실록』 14년 7월 17일). 이러한 조직의 변화에 맞추어 파보와 세보가 출간되었고 이어서 대동보가 출간되었으며, 가첩(家牒)과 가승의 보관이 집집마다 보편화되어 갔다.

족보는 두세 책부터 수십 책으로 구성되는 등 양의 편차가 크다. 그러나 그 체제는 비슷한데 첫 번째 책에는 서문(序文), 범례(凡例), 문헌록(文獻錄), 소목상전도(昭穆相傳圖), 시조 및 현조의 산도(山圖) 등이 수록되고 이어서 세대별 인명이 수록되는 형태이다. 그리고 각 인명에 대한 수록 내용은 인명(人名), 직책(職責), 자호(字號), 생몰(生沒) 연대, 행장(行狀), 배(配), 묘소(墓所) 등의 순서로 기재된다.

변천

족보는 종법·가계·문중 의식을 기반으로 편찬되지만, 이러한 의식은 사회·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시대별로 변모하였고 그것은 족보의 기재 내용과 체제에 투영되었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 족보의 변천 양상이 주목된다.

현전하는 족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476년(성종 7)에 간행된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이다. 이보다 조금 앞서 1422년(세종 4)에 『문화유씨영락보(文化柳氏永樂譜)』, 1441년에 『남양홍씨정통보(南陽洪氏正統譜)』, 1451년(문종 1)에 『진주하씨경태보(晉州河氏景泰譜)』 등 몇몇 가문의 족보가 간행되었다는 사실이 문헌에 나타나지만 현전하지는 않는다.

이 시기에 간행된 족보는 그 수록 내용에서 이전 시대의 생활 유풍 즉 양측적 친족 구조가 투영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일종의 데릴사위제도인 솔서혼(率壻婚), 아들딸 구분 없이 재산을 분배해 주는 균분상속(均分相續), 딸을 포함한 자식들이 돌아가며 부모의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 등의 생활 풍속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족보에는 친가뿐만 아니라 처가, 외가의 인적 구성원들이 함께 기재되었다. 또한 기재 순서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출생순이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17, 18세기에 편찬된 족보는 이전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시기에 조선시대의 부계 친족 구조가 정립되고 동족(同族) 마을을 비롯한 친영례(親迎禮), 장자(長子) 우대의 재산상속 및 제사상속, 봉분제(封墳祭)의 장례법 등 생활 풍속에 따른 친족 구조가 족보에 투영된다. 즉 친가를 위주로 하고 처가와 외가는 부수적이 되며, 남자 형제들이 출생 순서로 기재되고 다음으로 여자 형제들이 기재되며, 양자 제도가 뚜렷하게 기재되는 기재 양식상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 족보의 출간은 문중과 종가가 구심점 역할을 하였고, 어느 문중을 막론하고 창시보(創始譜)에서는 선조(先祖)의 계보를 확보하는 데 무게가 실렸다면, 이어서 속간되는 족보에서는 각지에서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 살아가는 족인들의 수족(收族)과 현조(顯祖)를 앞세우는 데 무게가 실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각 문중의 명문성(名門性)을 강조하려는 것이었고, 아울러 향촌 사회의 향권(鄕權)을 전제한 문중 간의 경쟁적 성향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6년 8월 8일).

그리고 이 시기의 족보는 양반 사족의 전유물이었고 보학(譜學)도 양반 내부의 일이었다. 혹여 문벌이 미미하거나 서얼로서 문사에 종사하거나 무선(武選)으로 뽑히는 중인들도 족보를 가지는 수가 있었지만, 상인 이하는 족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기에 족보는 양반을 증빙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로써 양반 신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발전에 편승하여 부를 축적해 요호부민(饒戶富民)으로 성장한 자들이나 신분을 상승시키려는 자들에게 족보를 소장하려는 욕구는 자연 발생적으로 증대하였다. 더욱이 양반 신분을 획득하는 경우 각종 양역(良役)을 모면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족보를 가지려는 욕구는 확대되어 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른바 거짓 족보인 위보(僞譜)가 나타나는 빌미가 되었다(『정조실록』 15년 1월 22일).

참고문헌

  • 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김용선, 「고려시대의 가계 기록과 ‘족보’」, 『이기백선생고희기념논총』, 1994.
  • 심승구, 「조선 초기 족보의 간행 형태에 관한 연구」, 『국사관논총』89, 2000.
  • 이수건, 「조선 전기 성관 체계와 족보의 편찬 체제」, 『한국사학논총』상, 1992.
  • 차장섭, 「조선시대 족보의 편찬과 의의 : 강릉 김씨 족보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2,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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