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도(朝天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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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로 파견한 조선 사절단의 사행 노정을 그린 기록화.

개설

조천도(朝天圖)는 조선전기에 명나라와의 대외 관계 속에서 제작된 기록화이다. 조천도의 명칭은 명에 파견하는 사신을 명나라 황제인 천자(天子)를 배알하는 ‘조천사(朝天使)’라고 지칭했던 데서 기원한다. 조천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56년(세조 2)에 세조가 경회루에서 조천도를 그린 어좌 병풍을 거두어 우의정이사철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후 16세기에 명나라 사행을 다녀온 구성원들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사행을 후세까지 기리기 위해 자신들의 모임을 묘사한 계회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명·청 교체기인 17세기 전반에는 후금이 점령한 요동 지역을 피해 등주(登州)나 각화도(覺華島)에 이르는 바닷길로 사행하면서 1624년 이덕형, 오숙, 홍익한 일행의 사은겸주청사행을 배경으로 한 갑자항해조천도(甲子航海朝天圖)가 제작되었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모사되어 전한다.

내용 및 특징

(1) 기록으로 전하는 조천도

1456년(세조 2) 세조는 습진훈도와 집현전 관원을 불러 진법과 사서오경을 강하게 한 뒤 어좌에 둘러놓았던 「조천도」 병풍을 거두어 함께 자리한 우의정이사철에게 내려주었다(『세조실록』 2년 4월 15일). 이 그림은 세조가 대군 시절이었던 1452년(단종 즉위) 사은사의 정사로 부사 이사철과 함께 연행하여 명 조정에 입조하였을 때 그려온 것이었다(『단종실록』 1년 2월 26일). 그림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으나 당시는 육로 사행이었으므로 해로 사행로를 중심으로 제작된 현존하는 1624년 갑자항해조천도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제작 형식도 화첩이 아닌 병풍으로 제작되어 일반적인 조천도 형식과는 다르다. 이는 세조의 지위를 고려하여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1575년(선조 8)의 「조천계축(朝天契軸)」은 홍성민(洪聖民)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宗系)와 시역(弑逆)에 관한 기록을 변무(辨誣)하였던 사실을 배경으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의 종계를 잘못 기록한 것에 대한 오류 수정을 명나라에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명나라 예부는 홍성민 일행에게 『대명회전』의 증수(增修)를 기다려 기재하라는 황제의 명을 구두로 전달하면서, 곧 조선에 조서를 내릴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조서가 언제 내려질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홍성민은 사신의 입장에서 일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귀국할 수 없다며 명나라 예부의 귀국 권유를 사양하며 버티고 있다가 명나라 황제의 확실한 약속을 받은 뒤 8월에 귀국하였다(『선조수정실록』 8년 12월 1일).

이 일은 조선의 오랜 숙원 해결의 실마리를 연 것으로 조야의 칭송을 받았다. 그리하여 홍성민과 비슷한 연배였던 서장관정윤복(丁胤福), 조자미(趙子美) 및 역관 이하 20명이 조천사행에서 동고동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계회도(契會圖) 형식의 조천도를 제작하여 그림과 함께 20인의 명부를 기록했다. 「조천계축」의 제작은 역관곽지원(郭之元)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으나, 곽지원이 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여 그림은 사행을 다녀온 지 5~6년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2) 1624년 갑자항해조천도

조선의 해로 사행은 명·청 교체기에 후금이 육로 사행로였던 요동 지역을 점령한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1621년(광해군 13)부터 대명(對明) 외교가 단절된 1637년(인조 15)까지 17년 동안 지속되었다. 해로 사행의 거리는 육로 사행의 두 배 반에 해당하는 거리로, 곽산 선사포에서 출항하여 요동반도 연안의 석성도, 장산도, 광록도, 여순구 등을 거쳐 산동성 등주에 정박한 뒤 이후부터는 육로로 북경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1627년(인조 5)의 주문사행부터 1629년(인조 7)의 사은사행까지 평양 인근 석다산(石多山)에서 배가 출항하였으며(『인조실록』 7년 6월 2일), 1629년부터 가도에 정착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견제하기 위한 영원위경략 원숭환의 건의로 해로 노정을 등주에서 각화도로 바꿔 정박하여 영원위를 거쳐 육로로 북경에 이르게 하였다(『인조실록』 7년 윤4월 21일).

명나라에 대한 해로 사행의 대표적인 예는 1624년 사은겸주청사행이다. 당시 사행을 배경으로 한 기록화로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연행도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항해조천도」 및 「조천도」, 개인 소장 「제항승람」 등이 전한다. 이들 작품은 모두 25폭으로 구성되었으며, 화풍은 차이를 보이지만 그려진 내용은 거의 일치하여 한 계열로 묶을 수 있다. 그밖에 육군박물관 소장 「조천도」는 25폭 중 18폭이 전하는데, 황현과 웅주 등 다른 화첩에는 포함되지 않은 지역이 있어 주목된다.

1624년 사행을 배경으로 그려진 화첩들의 제1폭과 제25폭에 평안도 곽산 선사포(旋槎浦)의 지명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제2폭에는 평안도 가도에 정착한 요동총병관모문룡의 유진처(留陣處)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제3폭에는 석성도 일대 어룡(魚龍)이 출현하여 조선 사절단이 탄 배가 위태롭게 항해하고 있는 장면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악천후와 고래의 출현 등으로 인한 해로 사행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밖에 험난한 항해 노정의 종착지이자 육로 노정의 출발지인 등주 외성과 등주부에서 북경에 이르는 지역의 주요 인물과 관련된 사적이 노정마다 상세히 묘사되었다. 제남의 태산진향 행렬, 우성현의 우묘(禹廟), 제하현의 대청교를 비롯하여 북경의 자금성과 내외성을 그린 것까지 연행 노정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려져 현장감을 준다.

항해조천도는 매우 다양한 화풍으로 묘사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연행도폭」은 현존 작품 중 화면의 박락이 가장 심하여 상태가 불량하지만 사행의 출발에서 선사포 회박 장면까지 총 25폭을 청록산수화풍으로 묘사한 기록화인 동시에 17세기 기록화와 산수화에 나타나는 양식에 가까워 사행 당시와 비교적 멀지 않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항해조천도」는 「연행도폭」을 비교적 충실하게 모사하였지만, 채색이나 묘사에서 도식적 한계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천도」는 「연행도폭」을 모본으로 18세기 후반 이후의 진경산수화풍을 반영하여 제작된 점이 이색적이다. 그 밖에 개인 소장 「제항승람」은 거의 19세기 후반 화풍을 반영하여 19세기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항해조천도가 후손들을 통해 모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료적 가치

현존하는 항해조천도는 17세기 초 조선과 중국의 실경을 배경으로 사행로의 지리적 정보와 현지 풍속은 물론 해로와 육로 노정에서 조천사행 당시의 정황과 주요 사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시각 자료이다. 또한 사행 구성원 중 화원이 포함되어 기록화 제작에 관여하였다. 항해조천도는 제작 당시에는 사신들 간에 우의를 다지는 데 역할을 했으며, 후대 사행의 지침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정은주, 『조선시대 사행기록화 연구』, 사회평론, 2012.
  • 정은주, 「육군박물관 소장 《조천도》연구」, 『학예지』 10,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3.
  • 정은주, 「명청교체기 대명 해로사행기록화 연구」, 『명청사연구』 27, 명청사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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