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인(趙守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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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8년(선조1)∼1600년(선조33) = 33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직재(直哉)이다.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과천(果川)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조정기(趙廷機)이고,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관찰사(觀察使)강욱(姜昱)의 딸이다. 홍문관(弘文館)전한(典翰)조종경(趙宗敬)의 손자이고, 호조 좌랑(佐郞)조수륜(趙守倫)의 막내 동생이다.

선조 시대 활동

조수인은(趙守寅) 1589년(선조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7년(선조30) 별시(別試) 문관(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겼고,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나갔다. 1599년(선조32) 예조 좌랑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를 겸임하였다. 그때 사은사(謝恩使)황진(黃璡)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600년(선조33)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는데,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아산현감(牙山縣監)으로 나갔다. 그러나 곧 병에 걸려 6월 9일 객사(客死)하게 되었는데, 향년은 33세였다.

성품과 일화

조수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강직(剛直)하고 개결(介潔)하며, 물욕이 적고 점잖았다. 좋은 가정(家庭)에서 인격을 수양하고, 훌륭한 사우(師友)들로부터 학문을 닦았으므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남을 따르지 아니하여 세리(勢利)에 대해서 무관심하였다. 그가 아산(牙山)으로 나갈 때에 사론(士論)에서는 바야흐로 그를 이조 정랑에 임명하여 인사행정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피하여 일부러 외직을 구하여 아산현감으로 나갔다. 그가 아산현을 맡아서 다스린 지 몇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후 아산 주민들은 유애비(遺愛碑)를 세워서 그의 선정(善政)을 칭송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광암리(廣巖里)의 선영에 있는데, 상촌(象村)신흠(申欽)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제용감(濟用監)정(正)이세온(李世溫)의 딸인데, 자녀는 3녀를 두었다. 차녀는 유학(幼學)김계(金祴)의 아내가 되었는데, 조수인은 아들이 없는 관계로 김계의 둘째 아들에게 후사(後嗣)를 부탁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상촌집(象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약포유고(藥圃遺稿)』
  • 『북저집(北渚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동춘당집(同春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