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응(諸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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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법 계산의 기본이 되는 천문 상수 중 기응(氣應)·윤응(閏應)·전응(轉應)·교응(交應)·주응(周應)·합응(合應)·역응(曆應) 등의 여러 응수(應數).

개설 및 내용

응수는 역원(曆元)에 준하는 천문 상수로, 역원이 알려져 있지 않을 때 응수를 참고하면 역원을 계산할 수 있다.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수시력(授時曆)』, 『대통력(大統曆)』에 기록된 응수에는, 태양과 달의 위치와 관련된 기응·윤응·전응·교응·주응 등의 다섯 응수와, 오행성(五行星)의 위치와 연관된 합응·역응이 있다. 다섯 응수는 역원이 되는 해의 동지인 원동지(元冬至) 때, 태양과 달이 위치한 곳을 나타내는 상수이다. 기응은 원동지와 그 직전 갑자일(甲子日) 자정(子正) 간의 길이를 말하며, 윤응은 원동지와 그 직전 삭(朔)과의 길이를 말한다. 전응은 원동지와 달의 근지점 사이의 길이를 나타내며, 교응은 원동지와 그 직전 황도와 백도 교점과의 거리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주응은 적도(赤道) 경도(經度)의 기점이 되는 허수(虛宿) 6도로부터 원동지에 태양이 위치한 수도(宿度)까지의 경도차를 나타낸다. 한편 오행성의 위치와 관련된 합응은 원동지 바로 전에 행성이 합(合)의 위치에 있던 시점으로부터 원동지까지의 길이를 가리키며, 역응은 행성의 영력(盈曆)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원동지까지의 길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응수는 관측 시점에 따라 변화하는 상수이므로, 역원이 다르면 역원에 관계되는 응수의 값도 달라진다. 따라서 응수의 값은 역(曆)마다 다르다. 역 계산에서는 계산하려는 해의 동지, 즉 천정동지(天正冬至) 때의 태양과 달 및 오행성의 위치를 구하기 위해서 먼저 계산의 기점이 되는 원동지 때의 위치를 구하는데, 이때 여러 응수가 이들의 계산에 사용된다.

특징 및 변천

조선시대인 1444년(세종 26)에 편찬된 『칠정산내편』은 『수시력』의 역원인 1281년을 계산의 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여기에 실린 응수의 값들은 1281년의 관측값에 해당한다. 그런데 실제 계산에서는 모든 응수를 갑자년(甲子年)인 1444년에 맞게 고쳐서 사용하였다. 이것은 명(明)나라 때 원통(元統)이 『수시력』을 약간 수정하여 『대통력』을 만들면서, 그 역원을 『수시력』의 역원인 신사년(辛巳年) 즉 1281년(원 지원 18)이 아니라 갑자년인 1384년(명 홍무 17)으로 정한 것과 비슷하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역법이 필요하였는데, 마침 홍무 연간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해이자 천문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갑자년이 있게 되자 이해를 역원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칠정산내편』을 편찬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수시력』의 역원을 택하였으나 실제 계산에서는 갑자년인 1444년을 역원으로 하는 응수값들을 사용한 것은, 마찬가지로 새로운 역원을 통해 역법을 정비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조선 역시 하늘의 뜻에 따라 세워진 왕조임을 나타내려는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칠정산내편』이 실제로는 1442년(세종 24)에 완성되었으나, 천문 역법과 관련된 다른 책들과 함께 1444년에 간행된 점 또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러한 의미와 관련이 깊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시력』의 응수와 『대통력』의 응수, 그리고 『칠정산내편』에서 사용된 정통 갑자 응수들을 비교하면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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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산내편』에서는, 그 상권(上卷)의 서두에 『칠정산내편』의 역원과 세실소장(歲實消長)의 분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여러 응(應)의 수는 시(時)에 따라 추측(推測)하는 것이므로 역원으로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응수는 역원에 준하는 상수로, 일식(日食)월식(月食) 및 절기(節氣) 등의 실제 계산은 모두 응수를 바탕으로 하였다.

표 1에서 주목할 것은, 1281년의 응수 중 윤응·전응·교응 등의 값이 같은 신사년의 응수값임에도 불구하고 『원사(元史)』의 ‘수시력경(授時曆經)’에 실린 값과, 『고려사(高麗史)』의 ‘수시력경’에 실린 값과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고려사』에 실린 응수값은 『대통력』에 수록된 신사년의 응수값과 같은데, 그동안 『수시력』에는 다르게 기록된 이 응수값이 언제 수정되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이 세 응수의 변경 시기에 대하여, 『명사(明史)』「역지(曆志)」를 편찬한 매문정(梅文鼎)은 “『대통력』에서 경삭(經朔)은 2각 빠르게, 입전(入轉)은 17각 약(弱) 느리게, 정교(定交)의 시각은 2각 강(强) 빠르게 고쳤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명사고(明史稿)』「역지」에서는, 『원사』 ‘수시력경’에 기록된 수치는 『수시력』 사용 초기의 수치일 뿐 훗날 사용한 정식 수치가 아니며, 『대통력』에 수록된 새로운 응수는 겉으로는 원통이 수정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수시력』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위문괴(魏文魁)의 『역측(曆測)』과 형운로(刑雲路)의 『고금율력고(古今律曆考)』에는 여기에 관한 좀 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금율력고』에서는, 역법 추산에 편차가 생겼기 때문에 『수시력』의 편찬자 곽수경(郭守敬)이 1294년(원 지원 31)에 스스로 관측을 통해 응수를 조정했다고 전한다. 『역측』에서는 더욱 자세하게, 1294년인 갑오년 5월 15일의 월식(月食) 추보(推步)에서 2각이 모자라 윤응에 2각을 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청(淸)나라 때 편찬된 『명사』와 『명사고』「역지」, 『명실록』보다 훨씬 이전에 간행된 『고려사』「역지」와 이미 고려시대에 사용된 강보(姜保)의 『수시력첩법입성(授時曆捷法立成)』에 기록된 세 응수의 값이 수정된 값이라는 사실은, 『대통력』의 신사년 응수값은 원통에 의해 수정된 것이 아니라 『수시력』이 사용되던 시기에 이미 수정되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표 1에서 『대통력』의 경우 갑자년인 1384년의 응수값은 관측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응수값이 수정된 신사년 즉 1281년부터 갑자년인 1384년까지의 차인 103년의 거산(距算)을 바탕으로 계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역법을 새로 만들 때는 관측을 통해 응수값을 확인하고 새로운 역원을 정해야 하는데, 『대통력』의 경우 관측을 하지 않은 채 『수시력』에서 수정한 응수값을 그대로 사용하여 역원만 갑자년인 1384년으로 바꾼 것이다. 『칠정산내편』에서 정한 1444년의 응수값 역시 1281년부터 갑자년인 1444년까지 163년의 거산을 바탕으로 계산하여 정한 것이므로, 『대통력』의 역원인 1384년의 홍무 갑자 응수와 그 의미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세종 연간에 일식과 월식의 계산 예(例)로 사용되었던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가령(假令) 상(上)」의 서두를 보면, ‘정통구년세차갑자위원(正統九年歲差甲子爲元)’으로 시작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사실상 1444년의 갑자 응수가 『칠정산내편』의 역원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이다. 따라서 『칠정산내편』의 편찬자가 명나라에서 『대통력』이 새로 반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원(元)나라 『수시력』의 역원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수시력』과 거의 다를 바 없으면서 응수만 바꾼 『대통력』의 역원은 사실상 역원으로서의 의미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명사(明史)』
  • 『명실록(明實錄)』
  • 『고금율력고(古今律曆考)』
  • 유경로·이은성·현정준 역주, 『세종장헌대왕실록』 「칠정산내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3.
  • 이면우, 「李純之·金淡 撰, 大統曆日通軌 등 6편의 通軌本에 대한 硏究」, 『한국과학사학회지』7권 1호, 1988.
  • 이은희, 『칠정산내편의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 李亮, 「從交食算法的差異看大統曆的編成與使用」, 『中國科技史雜誌』31卷 4號, 科學出版社,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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