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감계(丁亥勘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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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고종 24) 조선과 청국이 1885년 을유감계회담(乙酉勘界會談) 이후 지체되던 백두산정계비의 양국 변경 영역의 한계와 국경선 획정을 위하여 진행한 국경회담.

개설

1885년 간도와 백두산 인근의 조선과 청국의 국경을 조사하고 판정하려던 을유감계회담이 결론 없이 끝난 뒤 양국 이주민들의 갈등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국 간 국경회담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 회담을 정해년인 1887년(고종 24)에 열렸다고 하여 정해감계회담 혹은 정해감계라고 하였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말 청국은 영국과 아편전쟁(1840~1842년), 프랑스와 청불전쟁(1884~1885년), 러시아와 이리분쟁(1880년)을 겪으면서 열강에게 조차지를 제공하고 영토를 할양하면서 국경과 영토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던 간도와 두만강 유역, 백두산 인근의 국경을 획정하려고 하였으며, 그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강제로 청국인화하려는 정책을 펼쳐 폭력 사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간도 거주 한인들이 조선 정부에 간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 정부가 적극적으로 청국과 국경 회담에 임하였는데, 그것이 을유년인 1885년 열린 을유감계회담이었다. 을유회담은 양국이 서로의 주장만 확인한 채 끝을 맺었고, 간도 지역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결국 양국은 재차 국경회담을 열게 되는데 1887년에 열린 정해년 감계회담이었다.

발단

1885년(고종 22, 광서 11) 1차 감계회담(勘界會談)인 을유감계회담이 무위로 돌아간 뒤 간도의 한인과 청국인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지속되자 양국이 재차 국경회담을 열게 되었다. 당시 한인과 청국인의 갈등은 청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한인들에게 청국인으로 귀화하고 변발 등의 풍속을 따르지 않으면 토지와 가옥을 몰수하고 추방하는 양태를 보였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경과

정해감계는 1887년 4월 7일부터 윤4월을 거쳐 5월 28일까지 약 2개월여 간 회령에서 시작되었다. 청측에서는 목극등이 세운 백두산정계비는 국경을 정하는 ‘분계지비(分界之碑)’가 아닌 변경지대를 조사하기 위하여 설치한 ‘사변지비(査邊之碑)’로서 분계(分界)와는 무관한 것이며 기왕의 기록과 조사 들은 다만 토착민의 말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신뢰할 수가 없으니 산세(山勢)와 천과 강의 지세에 따라 새로 조사하고 측량할 것을 주장하였다. 회담은 1차 감계 때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논리만 주장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조선 측 감계사이중하는 청국의 독리길림조선회판변방영무처(督理吉林朝鮮會辦邊防營務處)진영(秦煐), 혼춘(琿春) 승판처(承辦處)덕옥(德玉), 총리혼춘흑정자등처둔간변방영무처(總理琿春黑頂子等處屯墾邊防營務處)방랑(方郎) 등과 도문과 두만이 같은 강임에는 동의하였으나, 토문과 두만은 별개의 것임을 주장하며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특히 현지답사에 나선 청국 대표는 1차 회담과 같은 어려운 난관이 있을 것을 알고는 억지로 자신들이 지정하는 곳을 경계로 정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이중하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 것이나 나라의 영토는 줄일 수 없다.”라고 단호히 그 요구를 거부하는 격렬한 회담 진행을 보여서, 결국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한 채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다만 정해감계에서는 조선 측 감계사이중하·팽한주(彭翰周)와 청국 측의 감계관방랑(方郎)·덕옥(德玉)·진영(秦瑛) 등 5명이 회담 결과에 따른 지도를 작성한 것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888년(고종 25) 1월에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이홍장(李鴻章)이 다시금 감계의 재개를 제의해 오자 조선 정부는 이중하를 제3차 감계사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감계사등록(勘界使謄錄)』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1, 동북아역사재단, 2008.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2, 동북아역사재단,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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