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양대신(北洋大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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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 중국의 유교를 바탕으로 하되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기치 아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주도한 이홍장의 관직이면서, 통상이홍장의 정치적 지위와 청국의 외교통상 담당자를 상징.

개설

1864년 이홍장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고는 청 정부의 요직에 올라 북양대신의 칭호를 받았다. 북양대신은 청국이 1861년 설립한 외교기구인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 소속된 통상대신으로 천진에 근거지를 두었다. 이홍장은 1870년 이후 남북 통상대신 직책을 모두 장악하고 외교를 관장하였다.

이홍장은 북양대신이면서 직예총독(直隸總督)에 부임한 후 청국의 근대화와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무엇보다 군사력 강화에 진력하였다. 이때 이홍장이 육성한 해군이 북양해군이었다. 이홍장은 일본을 가상 적국으로 간주하고 북양함대를 양성하는 등 부국강병책을 이끌면서, 국제사회에서 조선을 청의 속방(屬邦)으로 강화하려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북양은 남양의 상대말로 북경 인근의 바다와 발해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북양대신이 이홍장의 직책이었으나 당시 청국의 실질적인 권력자를 의미하는 상징성을 함유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청나라 황제 다음의 권력을 가진 인물로 인식되었다.

내용 및 특징

북양대신이 조선의 조야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홍장이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으로 외세를 막아내려는 시도를 펼치던 임오군란(1882년)부터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홍장은 조선의 고위 관료를 통하여 청국의 대외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1879년 이홍장은 영중추부사이유원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이 빠른 시일 내에 영국과 미국에 개국하여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권유하였는데, 이는 이홍장이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중국의 이이제이 계책이었다. 특히 1881년 전후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배후에서 조정하고 성사시킨 인물이 북양대신이었다. 북양대신이홍장은 고종에게 대미수교를 권고하고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라는 점을 조약에 삽입시켜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권을 대외적으로 공인시켰다. 더욱이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조선 내정을 간섭하던 원세개가 북양대신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으므로 청일전쟁 이전까지 조선 조야에서 북양대신이라는 칭호는 곧 청국의 황제 광서제보다 실질적인 지배자로 인식되었다.

변천

청일전쟁에서 정여창제독의 북양해군이 일본 해군의 이토제독에게 완패를 당하여 정원(定遠)·진원(鎭遠)을 비롯한 전함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일본에 나포되어 북양함대 자체가 분해되었다. 이때 북양대신인 이홍장은 시모노세키조약에 전권위원으로 파견되어 강화회담의 굴욕과 일본 자객에게 총상을 입는 등의 개인적 수모를 겪었다. 더욱이 강화회담을 체결하고 귀국해서는 매국노로 지목되어 북양대신이라는 권위와 위세도 사라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일기(駐韓日本公使館日記)』
  • 송병기, 「김윤식·이홍장의 보정(保定)·천진회담」, 『동방학지』 44, 1984.
  • 김현수, 「해리 파크스(H. S. Parkes)와 이홍장」, 『영국연구』 1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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