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呈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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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기녀나 무동이 궁중과 지방 관아에서 공연한 가무악의 종합예술.

개설

정재(呈才)는 원래 헌기(獻技), 즉 춤뿐 아니라 모든 재예(才藝)를 드린다는 뜻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궁중무용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 정재는 계통에 따라 송나라에서 전래된 교방악 계통의 당악정재(唐樂呈才)와,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향악정재(鄕樂呈才)로 구분되었다. 다만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이 명확했으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내용 및 특징

고려시대에 전래된 당악정재는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에 무보(舞譜)가 전하는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포구락(抛毬樂)·연화대(蓮花臺) 등으로, 모두 송나라의 대곡(大曲)에 해당한다. 그 밖에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 등도 공연되었다. 그중 구장기별기에는 일장기(一張機)에서 구장기(九張機)까지 9수의 가사가 있었으며, 왕모대가무의 경우 춤을 추다가 ‘군왕 만세’ 또는 ‘천하태평’ 등의 글자를 만든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당악정재는 군왕의 축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형식적으로는 죽간자(竹竿子)를 든 2명이 시작과 마무리를 담당하였으며, 춤의 앞뒤에 치어(致語)를 올리고 구호를 외치는 절차가 포함되었다.

고려시대의 향악정재는 무고(舞鼓)·동동(動動)·무애(無㝵) 등인데, 역시 『고려사』「악지」에 무보가 전한다. 무고의 경우 정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읍사(井邑詞)를 노래했고, 동동은 동동사(動動詞)를 불렀으며, 무애의 경우에는 불교와 관련된 노래를 불렀다. 향악정재는 당악정재와 달리 죽간자의 인도 없이, 음악이 울리면 곧바로 시작하고 춤이 끝나면 꿇어앉아 큰절을 한 뒤 일어나서 퇴장하는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고려시대의 당악정재가 계승되었을 뿐 아니라, 금척(金尺)·수보록(受寶籙)·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하황은(荷皇恩)·하성명(賀聖明)·성택(聖澤)·육화대(六花隊)·곡파(曲破) 등의 당악정재가 새롭게 창작되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무보가 전하는 이들 정재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조종(祖宗)의 성덕을 칭송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정재의 가(歌)·무(舞)·악(樂) 가운데 가, 즉 악장으로 이루어진 노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에 비해 조선시대 전기에 새로 창작된 향악정재는 8종목으로, 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봉래의(鳳來儀)·향발(響鈸)·학무(鶴舞)·학연화대처용합설(鶴蓮花臺處容合設)·교방가요(敎坊歌謠)·문덕곡(文德曲)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당악정재와 마찬가지로 『악학궤범』에 무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중 고려시대의 당악정재인 오양선의 창사(唱詞)를 향발의 창사로 사용한 점, 향발·학무에 당악을 반주 음악으로 쓴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에는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향악정재에서 한문 창사를 쓰기도 했고, 당악정재에서 죽간자를 사용하지 않거나 향악곡을 반주 음악으로 쓰는 현상도 나타났다.

순조 이전에 창작된 정재는 광수무(廣袖舞)·검기무(劍器舞)·선유락(船遊樂)·초무(初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그중 검기무와 선유락은 지방에서 먼저 활발히 공연되다가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순조대에는 23종목의 정재가 창작되었는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는 그중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경풍도(慶豊圖)·만수무(萬壽舞)·망선문(望仙門)·무산향(舞山香)·박접무(撲蝶舞)·보상무(寶相舞)·사선무(四仙舞)·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영지무(影池舞)·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제수창(帝壽昌)·첩승무(疊勝舞)·춘대옥촉(春臺玉燭)·춘앵전(春鶯囀)·최화무(催花舞)·헌천화(獻天花) 등 17종목의 창사를 지었다. 효명세자가 창사를 짓지는 않았으나, 순조대에 창작된 정재에는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연화무(蓮花舞)·춘광호(春光好)·침향춘(沈香春)·향령무(響鈴舞) 등이 있다.

헌종대에는 관동무(關東舞)가 지방에서 궁중으로 유입되었고, 고종대에는 선천의 항장무(項莊舞)와 성천의 사자무(獅子舞)가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한편 정재는 지방관아에서도 활발하게 공연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각종 읍지(邑誌)에 따르면, 전국의 교방(敎坊)에서 무고·포구락·선유락·향발무·검무·처용무(處容舞)·아박무 등을 교습하고 연행하였다. 다만 진주 교방의 정재를 기록한 『교방가요(敎坊歌謠)』를 살펴보면, 교방의 경우 정재의 절차와 도구 및 의상이 궁중보다 훨씬 간소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고려사』에는 1073년(고려 문종 27) 2월에 교방의 여제자 진경(眞卿) 등 13명이 연등회에서 답사행가무를 연행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것이 당악정재가 상연된 최초의 기록이다. 또 그해 11월에 팔관회를 베풀 때, 교방 여제자 초영(楚英)이 포구락과 구장기별기를 공연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당악정재는 팔관회와 연등회 등에서 주로 공연되었다. 향악정재의 경우 공연 기록은 뚜렷하지 않으나, 여러 연향에 두루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정재는 다양한 의례에서 공연되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악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예조에서 조회와 연향에 사용할 음악을 정해서 올렸는데, 국왕연사신악(國王宴使臣樂), 국왕연종친형제악(國王宴宗親兄弟樂), 국왕연군신악(國王宴群臣樂) 등의 의례에 정재가 포함되었다(『태종실록』 2년 6월 5일).

그뿐 아니라 왕이 거둥한 뒤 환궁할 때도 정재를 공연하였다. 태조가 면복(冕服)을 입고 친히 관향(祼享)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뒤, 제례를 마치고 환궁할 때 운종가(雲從街)에서 전악서(典樂署)의 여악들이 노래를 부르고 정재를 올렸는데, 왕이 세 차례나 가마를 멈추고 이를 관람했다고 한다(『태조실록』 4년 10월 5일). 또 신주를 부묘하고 환궁하거나(『세종실록』 6년 6월 14일), 선농제(先農祭)를 지내고 왕이 친히 경작하는 전지(田地)를 간 뒤 환궁할 때도 정재를 공연하였다(『중종실록』 23년 1월 10일). 그런 까닭에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의 대례(大禮)를 앞두면, 기생들은 날마다 정재를 연습해야 했다(『광해군일기』 11년 3월 11일).

세종대에는 정재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종묘·조회·공연에 상연할 정재로, 발상·정대업·보태평·봉래의·오양선·포구락·연화대·처용·동동·무애·무고·향발 등을 정하여 항상 연습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1년 10월 3일). 세종은 거둥하여 곡파무(曲破舞) 정재를 구경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기억하는 자가 없었는데 잊지 않고 기억한 늙은 기생에게 상을 내릴 만큼 정재에 관심이 많았다(『세종실록』 7년 9월 17일).

중종대에는 정재 악장의 정비를 시행하였다. 중종은 정재 악장 속의 음사(淫詞)와 불교에 관계된 내용을 고칠 것을 명하였다. 그 결과 아박 정재의 동동사는 남녀 음사에 가까워 신도가(新都歌)로 대신하였으며, 무고 정재의 정읍사는 효자 문충(文忠)이 지은 오관산(五冠山)으로 대치되었다. 또 처용무의 영산회상(靈山會上) 대신 새로 지은 수만년사(壽萬年詞)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에는 순조대에 23종목의 정재가 창작되어 공연 종목이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효명세자는 예제(睿製)로 20종목의 정재 악장을 지었는데, 새롭게 창작된 정재는 형태가 매우 다채로웠다. 내용에서는 정치적 목적성과 서정성 및 유희성이 드러났고, 유·불·도의 내용이 함께 등장하는 등 정재 악장이 포용하는 사상적 지평이 상당히 넓었다. 형식에서도 춘앵전과 무산향 등의 독무 정재가 나타나는 등 새로운 형식이 시도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순조무자진작의궤(純祖戊子進爵儀軌)』
  • 『순조기축진작의궤(純祖己丑進爵儀軌)』
  • 『교방가요(敎坊歌謠)』
  •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 민속원, 2003.
  •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 장사훈, 『한국전통무용연구』, 일지사, 1977.
  • 정은혜, 『정재연구Ⅰ』, 대광문화사, 1996.
  • 배인교, 「조선후기 지방관속 음악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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