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田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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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기준으로 납부하는 전조 및 대동미 등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

개설

조선시대에 부(賦)라는 용어는 공(貢)이라는 용어와 더불어 세금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중 전부(田賦)는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되는 세금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조선전기의 경우는 논과 밭 등에 거두는 토지세인 전조(田租)만이 해당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전조와 대동미(大同米)를 아울러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에는 토지·호(戶)·인신을 기준으로 하여 전조와 공물, 그리고 역을 수취하였다. 이때 전부는 전조와 같은 용어로 사용되어 구체적인 세목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세종대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지역의 농업생산물을 기록하면서 전부라는 항목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는 전조로 거두어들이는 미곡류를 기재한 것이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세종실록』 「지리지」 충청도][『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또 세종대에는 “본국(우리나라)의 전부법은 매 결당 30두를 걷는 것이다.”라고 천명하는 내용이 있어(『세종실록』 19년 4월 14일) 전부라는 용어가 전조와 동일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부라는 용어는 소유한 토지에 비례하여 군역에 나아가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그러한 용례는 많지 않아서 태종대(『태종실록』 12년 7월 29일)와 문종대(『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0일) 실록 기사에 각 한 차례씩 보였다.

변천

조선후기에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과거 각 군현 단위로 부과되고 군현에서 다시 각 민호에 분정하여 수취하던 공물이 결당 12두의 미곡을 거두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즉, 공물이 전결세화된 것이었다. 이후 전부는 기존의 전세와 신설된 대동미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물론 전세와 대동미는 엄연히 다른 세목으로 관리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용된 전부가 특정한 세목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점차 전세와 대동미를 전부로 통칭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중앙에서는 전부를 군정(軍政)·환곡(還穀)과 더불어 삼정(三政)으로 부르며(『철종실록』 13년 6월 12일) 국가 수세 업무의 핵심으로 파악하였다.

참고문헌

  •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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