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곶목장(箭串牧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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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한양 동교(東郊) 일대에 설치한 왕실 목장.

개설

전곶목장(箭串牧場)은 조선 태조 연간에 도성 동쪽 근교 살곶이벌 일대에 왕실 목장으로 설치되었다. ‘살곶이’를 한자로 차용하면서 기록물에는 ‘전곶목장’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어마를 비롯해 왕실에서 사용할 말과, 도성 및 국토를 방위하는 데 쓰이는 전마(戰馬), 명나라에 보낼 진헌마(進獻馬) 등을 사육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전곶목장은 병조 예하의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관할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 설치 유래

전곶목장은 태조 연간에 어승마를 포함해 왕실에서 사용할 말과 전마, 진헌마 등을 사육하고 조련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따라서 조선 조정에서는 전곶목장을 중시하여, "다른 목장과 비교할 수 없다."거나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헤아림으로 설치하였다."고 강조하며(『성종실록』 23년 6월 18일), 그 관리에 전념하였다. 그런 까닭에 전곶목장은 어마목장(御馬牧場), 내승목장(內乘牧場), 사복목장(司僕馬場), 동교목장(東郊牧場), 양주목장(楊州牧場)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약 450년간 존속하였다.

2. 조직

설치 초기에는 병조 예하의 사복시에서 담당하였으나, 나중에는 내사복시가 맡아 관리하였다. 내사복시에는 내승(內乘) 3명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1명은 사복시 정(正)이 겸임하며 실무를 집행하였다. 나머지 2명 또한 종2품에서 9품까지의 관원이 겸임하되, 1명은 내사복시에서, 다른 1명은 전곶목장에서 관리를 담당하였다. 내사복시에는 그밖에 종6품 안기(安驥), 종7품 조기(調驥), 종8품 이기(理驥), 정6품~종9품의 마의(馬醫) 등이 배치되어, 여마(輿馬)구목(廐牧) 및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전곶목장의 조직은 암말 100필, 숫말 15필로 도합 115필로서 1군(群)을 편성, 매년 85필 이상을 번식시키도록 하였다. 목장에 배치된 목자는 신량역천(身良役賤) 계층을 목마군으로 편성되어 목장 보호, 표획(豹獲), 목책·석성(石城)의 수축 등을 담당하였다.

3. 경계 영역

전곶목장의 영역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1678년(숙종 4)에 편찬된 『목장지도(牧場地圖)』의 「사복시 전곶목장도」, 18~19세기에 편찬된 『사복시 전곶목장 지도』, 규장각 등에 소장된 전곶목장 지도 22종이 수록된 『서울의 옛지도』 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조선초기 전곶목장의 경계 및 영역은 『사복시 전곶목장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지도에 따르면 전곶목장의 경계는 아차산 마루에서 망우동, 중량포, 답십리를 거쳐 살곶이에 이르고, 살곶이에서 한강을 경계로 하여 그 안에 위치한 뚝섬, 신천(新川), 광장리(廣壯里) 등을 포함하며, 광나루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있다. 살곶이에서 한강변까지의 구간에는 목책과 석책을 설치하고, 버드나무를 심어 놓았다. 이 경계가 포함하는 영역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진구, 중랑구, 동대문구 일부와 송파구 잠실동 등을 아우른다. 총 둘레는 약 30~40리로, 1,000필의 말을 사육하며 10,000필의 새끼를 기를 수 있는 넓은 목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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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곶목장은 동쪽과 서쪽, 북쪽의 경계는 변동이 없었다. 그에 비해 남쪽의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쳐지는 지점은 퇴적 작용으로 모래와 흙이 쌓여 뾰족한 곶(串)과 사주(砂洲)를 이루고 있는데,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마치 섬처럼 보인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폭우로 급류가 흐르면 모래와 흙이 떠내려가 말이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때마다 막대한 인원과 경비를 들여 목책과 석성을 다시 쌓아 보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중기와 후기에는 전곶목장의 경계와 영역이 축소되어 갔다.

1) 조선초기의 영역(태조~인종)

초기에는 목책과 석성을 쌓아 말이 달아나는 것을 막고, 도적의 침입을 방비하였다. 세종과 세조, 성종 연간에는 홍수 등으로 경계가 무너져, 경기 백성과 연호군(煙戶軍) 등을 동원해 목책 등을 수축하고 영역을 보호하는 데 진력하였다.

특히 1462년(세조 8)에는 왕이 전곶목장에 나아가 경계를 살피고, 목장을 철저히 관리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는 관리가 소홀하여 한때 그 경계가 문란해지기도 하였다. 그 뒤 성종 연간에는 복구 작업이 이루어져 전곶목장은 아차산, 중량포, 답십리, 살곶이다리, 뚝섬, 신천, 광진 등으로 이어지는 영역을 유지하게 되었다.

2) 조선중후기의 영역(명종~헌종)

중기에는 홍수 등으로 목책과 석성 등이 무너지고 말이 유실되는 일이 일어나, 명종 연간에 대대적인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특히 사복시 제조 상진(尙震)의 건의에 따라 1552년(명종 7)부터 1555년(명종 10)까지 3년 동안 썩은 목책을 갈고 토성을 쌓았으며, 미요문(尾窯門)에서 광진까지 2,230보에 이르는 버드나무 수책을 세워 말이 달아나는 것을 막고 경계를 튼튼히 하였다. 그 뒤 1558년(명종 13)까지 다시 3년 동안 계속해서 석성과 토성을 쌓아 목장을 견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왕실의 궁가(宮家)들이 들어서고 세도가가 목장을 점유하게 되면서, 말은 메마른 자갈밭에서만 자라게 되어 병들어 죽는 일이 많았다. 더욱이 전곶목장은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크게 파괴되었다가 효종·숙종·영조·정조를 거치며 복구되었으나, 잦은 홍수로 오늘날의 성동구 뚝섬과 광진구 일대가 축소되었다. 정조대의 경우 목장 안에 무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밭과 논두렁이 있으며, 심지어 빈 땅의 갈대는 모두 궁방(宮房)에서 떼어 받는 과목으로 들어가고 말아 말을 사육하기 어려웠다(『정조실록』 21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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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말기의 영역(헌종~고종)

헌종 이후에는 정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목장이 축소되었고, 특히 ‘박패(朴排)’라는 법이 생기면서 살곶이벌과 뚝섬 사이의 말이 도망가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박패란 목장에 나무를 심어 우리를 만들어서 말이 뛰쳐나가는 것을 막는 것을 일컫는다(『정조실록』 21년 7월 8일). 그런데 박패 외곽에 농경지와 불법 사유지가 발생하면서 목장이 축소되고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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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설

전곶목장에서는 진헌마(進獻馬) 27종과 진헌정색마(進獻正色馬) 21종이 사육되었으며, 주요 시설로는 화양정(華陽亭)·환장(環場)·여기연(女技淵)·언포(堰浦)·수책(樹柵)·자마장(雌馬場)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1) 시설

① 화양정은 방목을 감독하고, 왕이 열무(閱武)·강무(講武)·점마(點馬) 등을 사열한 장소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자리한 건국대학교 내에 위치해 있다.

② 환장은 2개의 문이 달려 있는 사각형 건물이다. 여기에 말을 몰아넣은 뒤 점고와 낙인, 질병 치료를 행한 다음 한 마리씩 나오게 하여 나이, 색깔, 체격 등을 살펴 진헌마를 선발하였다.

③ 여기연은 중량포 부근 즉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에 위치한 물웅덩이로, 말에게 그 물을 먹였다.

④ 언포는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군자동, 중곡동 일대에 위치한 저수지로, 성동구 송정동 방향으로 물이 흐른 까닭에 살곶이 다리에서 말이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⑤ 수책은 살곶이다리에서 광진까지, 바람을 막고 말이 달아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버드나무를 심어 조성한 울타리를 말한다. 『사복시 살곶이목장 지도』에 따르면, 그 길이가 2,210보였는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3,477m에 이르렀다.

⑥ 자마장은 양마를 확보하기 위해 암말만 목양하던 사육장으로, 버드나무 수책 밖인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 자마장 내의 암말이 발정기가 되면 우수한 수말과 교접시켜 양마를 생산하였다.

2) 진헌마 27종은 다음과 같다.

(1) 은종미담적(銀鬃尾淡赤) 표적마(表赤馬), (2) 흑종미담백(黑鬃尾淡白) 가리온마 (加里溫馬), (3) 철종미황(鐵鬃尾黃) 고라마(古羅馬), (4) 사명마(四明馬), (5) 청백(靑白) 백총마(白驄馬), (6) 분자(粉觜) 거흘마(巨割馬) (7) 표둔(豹臀) 자흘마(者割馬), (8) 환안(環眼) 월안마(月眼馬), (9) 담백(淡白) 형설아마(烟雪阿馬), (10) 백검(白瞼) 자불마(者佛馬), (11) 청색(靑色) 총마(驄馬), (12) 황마(黃馬) 공골마(公骨馬), (13) 적색(赤色) 적다마(赤多馬), (14) 백색(白色) 송골아마(松骨阿馬), (15) 흑색(黑色) 가라마(加羅馬), (16) 사색(沙色) 부로마(夫老馬), (17) 밤색[栗色] 구랑마(仇郞馬), (18) 회색(灰色) 추마(騅馬), (19) 옥정(玉頂) 소태성마(小台星馬), (20) 옥비(玉鼻) 간자마(看者馬), (21) 유(騮) 유마(騮馬), (22) 편(騙) 할신마(割腎馬), (23) 화두박(花肚膊) 월라마(月羅馬), (24) 쌍수박(雙綉膊) 연익마(鳶翼馬), (25) 흑종미황(黑鬃尾黃) 고라마(古羅馬), (26) 옥비첨(玉鼻尖) 미말백마(鼻末白馬), (27) 할마(割馬)

3) 진헌정색마 21종은 다음과 같다.

(1) 철청총마(鐵靑驄馬), (2) 자류마(紫騮馬), (3) 연전총마(連錢驄馬), (4) 백송고라마(白松古羅馬), (5) 적자불마(赤者佛馬), (6) 백가리온마(白加里溫馬), (7) 연설아마(烟雪阿馬), (8) 오명마(五明馬), (9) 청가라마(靑加羅馬), (10) 구랑마(仇郞馬), (11) 적다간자마(赤多看者馬), (12) 황고라마(黃古羅馬), (13) 유거흘마(騮巨割馬), (14) 포도자불마(葡萄者佛馬), (15) 공골마(公骨馬), (16) 오류마(烏騮馬), (17) 담가라마(淡加羅馬), (18) 표적다태성마(表赤多台星馬), (19) 적부로마(赤夫老馬), (20) 유총마(楡驄馬), (21) 추마(騅馬)

4. 기능

전곶목장은 말을 사육하고 관리하며, 전국의 목장에 말을 분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왕실에서 사용할 말과 전마, 진헌마 등을 조련해 공급하였으며,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열무와 강무를 시행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1,000필의 말을 사육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정치 기강이 해이해진 중기 이후에는 400~500필의 말을 생산할 정도로 축소되었다.

참고문헌

  • 남도영, 『韓國馬政史』, 한국마사회 한국마사박물관, 1997.
  • 남도영 해제, 『목장지도해제』, 국립중앙도서관, 2007.
  • 남도영, 「箭串牧場」, 『濟州島牧場史』, 한국마사회 한국마사박물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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