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패(藏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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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에 중앙관서에서 과하게 단속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순찰군관의 금패(禁牌)를 일정 기간 회수하던 관행.

개설

조선후기 중앙관서에는 도성민의 풍속을 규찰하는 금패가 주어졌다. 삼사(三司) 등 각사에 속한 순찰군관은 금패를 가지고 풍기를 단속하였는데, 적발되면 속전(贖錢)을 거두어 관서의 경비를 충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 해의 끝과 다음 해가 시작되는 며칠 동안은 금패를 적용하는 일을 자제시켜, 도성민이 설에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사람들을 대접하는[餞迎] 세시 풍습이 유지되도록 하였다. 또 전염병이 퍼져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난 때에도 정부에서 장패하는 명을 내려 도성민들이 한 시름 돌릴 수 있도록 하였다.

연원 및 변천

17세기 이후 도성 안팎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왕실, 관원뿐 아니라 하급서리, 공·시인, 군인, 장인 수공업자 등 다양한 계층이 서울에 거주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도성에 유입된 자들은 농토를 경작하지 않는 대신 관아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상업, 운수업, 수공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자들이었다. 이처럼 도성에 소비인구 증가하고 각종물화가 집결되는 가운데 소비문화 역시 발달하게 되었다. 현방(懸房)에서 전담하던 소고기의 도살과 판매 외에 민간에서 농우를 도축하여 식용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확대되었다. 또 술의 소비량도 늘어나서 서울 주민이 먹는 쌀의 절반에 달하는 양이 술 빚는 데 쓰인다고 할 정도였다. 이에 조선후기 중앙정부는 소 도축 금지와 금주령을 자주 내렸지만 효과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장패의 관행은 19세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장패는 조선후기 삼금 정책 중 소 도축을 금지하는 우금(牛禁),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주금(酒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농우를 함부로 도살하는 것을 금하였다. 또 흉년 시 술 빚는 행위를 규제하여 도성에 쌀이 부족해지고 곡가가 등귀하는 염려를 덜고자 하였다. 이처럼 우금과 주금의 명이 내려질 때에는 연말연시라 해도 장패의 명이 내려지지 않았다. 장패는 기본적으로 도성의 소비관행과 관련되기 때문에 풍년일 경우에는 관행적으로 시행하더라도,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아 인구 수와 농우 수가 급격히 줄어들 경우 시행되지 못하였다.

조선 정부는 농사의 작황이 평년 이상일 때는 연말연시에 장패를 명하여 도성민이 술과 고기를 넉넉히 소비하는 것을 허용하였지만, 가뭄이나 전염병이 들었을 때는 우금, 주금의 명을 내려 사치한 소비를 자제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모두 백성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 김대길, 「조선후기 牛禁에 관한 연구」, 『史學硏究』52, 한국사학회, 1996.
  • 김대길, 「조선후기 서울에서의 三禁政策의 시행과 그 추이」, 『서울학연구』13,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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