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무대(壯武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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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평안도 병영에 소속된 기병.

개설

조선시대에 평안도의 군사 편제와 명칭은 다른 지역과는 달랐다. 평안도 병영의 군대 중 근간을 이루는 것은 흔히 정삼장(精三壯)이라 일컫는 정초군(精抄軍)·삼수군(三手軍)·장무대(壯武隊)였다. 정초군은 보병이고, 장무대는 기병이며, 삼수군은 속오군과 같은 군인으로서 양인으로 이루어진 양삼수(良三手)와 천인으로 구성된 노삼수(奴三手)가 있었다. 본래 평안도에는 기병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별시위(別侍衛)·정로위(定虜衛) 등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장무대로 개편되었다.

처음에는 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에 나서지 못한 출신(出身)이나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품관인 향품(鄕品) 가운데 선발하였다. 그러나 별무사(別武士)가 창설되고 무반 승진 시험인 도시(都試) 참여의 특권이 별무사에게 주어지자, 장무대의 격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힘없고 가난한 무리들이 주로 장무대에 투속하였다. 그럼에도 장무대는 병자호란 이전까지는 기병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평안도 군인 모두를 돌려보내는 파방(罷防)의 조치가 내려졌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굴복을 당한 후로 평안도는 물론 강화도, 남한산성 등의 방어 시설을 해체시키고 군사를 해산해야 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략할 때에 조선이 자신들에게 배후의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평상적인 자위(自衛) 부대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황해도의 군병들은 직접 군역(軍役)을 담당하기 위하여 상번(上番)하기도 하고 군역을 대신하여 포(布)를 납부하기도 하였으나, 청나라의 접경 지역이었던 평안도에서는 산성의 수축이나 군사의 조련을 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평안도 각 진에서 근무하는 방군(防軍)과 병영의 정초군·삼수군·장무대 등의 부방(赴防)과 조련을 폐지하였다. 대신에 직접 군역을 담당하는 정군(正軍)과 이러한 정군을 경제적으로 보조해 주던 보인(保人)을 막론하고 수만 명에게 포 2필(疋)을 내게 하여 그것으로 병영의 필요를 충당하게 하였다. 그 결과 장무대를 비롯한 평안도 군사들에게는 실질적인 군사로서의 임무 대신에 포를 내게 하는 납포군(納布軍)으로서의 임무만이 남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평안도의 기병인 장무대는 해마다 포 2필을 내는 한편, 사행(使行)이 있을 때마다 말을 조달하는 역(役)을 감당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호수(戶首)가 보인에게 포를 받아 전복(戰服)과 군장(軍裝) 등을 마련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장무대의 경우 소속 보인의 신포(身布)는 병영에서 거두어 가 쓰고 호수는 자기 혼자 힘으로 전복과 군장을 마련해야 했다. 게다가 사행이 자주 있을 때에는 말이 혹사당하여 죽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에 장무대 스스로가 말을 새로 마련해야 하였으므로 고역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로 인하여 장무대 군인들은 그 군역에서 빠져나가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숙종 34년부터 37년까지 평안도관찰사와 순무사를 지낸 바 있는 윤지인(尹趾仁)의 문제 제기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1712년(숙종 38) 동지사(同知事)윤지인은 장무대와 정초군의 군안(軍案)은 사실상 모두 허부(虛簿)인데, 그 주된 원인은 각 읍의 교생(校生)과 감영(監營)·병영(兵營)군관(軍官)역가(役價)가 헐한 군역이 대규모 산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역을 고르게 하고 헐한 역으로 몰려드는 폐단을 막아야 군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윤지인의 주장에 의하여 2필의 역을 부담하고 속오군의 역까지 짊어지고 있던 장무대의 역은 1713년(숙종 39)에 1필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때 장무대의 역가(役價)를 1필로 줄인 것도 그 군인의 양역 부담을 완전히 고르게 경감한 것은 아니었다. 군역을 지는 대신 포(布)를 납부하는 납포역(納布役) 외에 파발(擺撥) 근무가 장무대의 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평안도의 파발 20참(站) 중에 의주 관문참(官門站)의 입발역은 의주부에서 스스로 담당하였지만 나머지 19참의 입발역은 모두 병영의 장무대·정초군이 담당해야 했다.

또 장무대는 입발역뿐 아니라 군위군역(軍威軍役)도 부담해야 했다. 청의 칙사가 왕래할 때 기병인 장무대는 사행이 통과하는 평안도 내 의주·선천·가산·순안 등 4도회(都會)에서 200명씩 차출되는 군위군(軍威軍)으로 차출되었다. 사행이 갈 때와 올 때 모두 8번 징발되므로 1,600명이 동원되는데 이것도 장무대 호수(戶首)들이 모두 감당해야 했다.

변천

장무대의 군제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납포와 입역을 모두 부담하고 있던 정군에게 납포의 의무를 없애 정군과 보인을 확연히 구분해야 했다. 이것은 1731년(영조 7)에 중앙정부 차원에서 해결책을 마련하여 마무리 지어졌다. 이른바 정삼장이라 부르는 평안도 병영의 정초군·삼수군·장무대 8,900여 명의 1필 역 부담을 없애고 그 결손분은 비변사에서 관장하는 감영과 병영의 목(木)을 지급하여 채우도록 하였다.

장무대의 형태와 군액(軍額)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1759년(영조 35) 『관서양역실총(關西良役實總)』이 간행·반포되어 그 군액이 고정되었다. 『관서양역실총』에 의하면 기병인 장무대에는 보병이 첨가되었으며 그 군액은 마병장무대 931명, 보병장무대 1,494명, 장무대 2,982명, 총 5,407명으로 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 『관서양역실총(關西良役實總)』
  • 권내현, 「조선 후기 평안도 방어 체제의 정비와 이완」, 『사학연구』 69, 2003.
  • 정연식, 「17·18세기 평안도 양역제의 변천」, 『한국문화』 2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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