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승(將校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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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산성을 수비하기 위해 조직한 승병 부대의 지휘관으로, 총섭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함.

개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정에서는 도성을 비롯한 국가의 주요 시설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승병(僧兵) 부대의 군영인 치영(緇營)을 배치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장교승(將校僧)은 치영에서 산성의 수비를 맡은 승군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다. 위로는 최고 지휘관인 총섭(摠攝)을 보좌하였으며, 일정한 급료를 받았다.

내용 및 변천

숙종은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승병 부대의 군영 즉 치영을 설치하였다. 치영은 중앙 군영인 총융청(摠戎廳)에 소속되었으며, 중흥사(重興寺)를 본영(本營)으로 삼고 산성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편제는 총섭 1명,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 47명, 그리고 급여를 받는 73명의 승군과 무급승 250명 등 총 372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가운데 장교승은 승군의 지휘관으로, 좌별장승(左別將僧)·우별장승(右別將僧)을 비롯해 천총승(千摠僧), 파총승(把摠僧), 초관승(硝官僧) 등으로 구분되었다. 대체로 그 직명(職名)은 조선시대 후기 각 군영의 일반 직명에서 유래하였다.

먼저 파총은 오군영(五軍營) 등에 있던 관직이다.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에 근거해, 1594년(선조 27)에 훈련도감을 창설하면서 좌사와 우사에 각각 파총 1명을 처음으로 두었으며, 이후 1606년(선조 39)에는 정원을 5명으로 확대하였다. 그뿐 아니라 총융청에도 파총을 두었는데, 파총승은 이 편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천총승 역시 각 군영에 소속되었던 정3품 관직인 천총에서 유래하였다. 천총은 영(營)의 하위 조직인 부(部)를 지휘, 통할한 고급 지휘관으로, 총융청에도 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초관승은 100명 단위의 군대 편제인 초(哨)를 통솔하던 종9품 관직인 초관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북한산성에 주둔한 승병의 편제는 그 당시 일반 군영의 편제와 거의 동일하였으므로, 장교승은 초급 지휘관의 소임을 맡은 승려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북한산성의 승군 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1729년(영조 5)에는 부제조(副提調)조현명(趙顯命)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 소속인 삼남(三南) 각 사찰의 주지와 승장(僧將) 등의 소임을 기존의 총섭에서 그 아래인 장교승 중에서 임명하게 하였다(『영조실록』 5년 10월 26일). 이때의 조치에 따라 남한산성의 승군 편제도 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북한지(北漢誌)』
  • 김영태, 『한국불교사개설』, 경서원, 1986.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갑주,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전의 종합적 고찰」, 『불교학보』25,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88.
  • 여은경, 「조선후기 산성의 승군총섭」, 『대구사학』32, 대구사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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