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혜사(慈惠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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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의 원찰로, 황해도 신천군에 있는 절.

개설

자혜사(慈惠寺)는 고려초기에 창건되었다. 고려초기에는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군사 주둔지 역할을 했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효령대군의 개인적 신앙을 위한 원찰(願刹)이기도 하였다. 조선 명종대에는 주지를 사칭하고 국가의 토지를 무단으로 빼앗아 경작하는 승려로 인하여 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자혜사는 황해도 신천군 서원리청양산(靑陽山)에 있는 절이다. 1716년(숙종 42)에 작성된 『자혜사중수기(慈惠寺重修記)』에는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절에 남아 있는 석등(石燈)과 석탑(石塔)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은 높이 3.88m, 맨 아래 기단석에 복련(覆蓮)의 12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을 새기고, 그 위에 높이 1.17m 되는 육각기둥을 세웠으며, 다시 그 위에 중대석을 놓고, 그 밑면에 12엽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을 새겼다. 중대석 위에 육각의 등불을 놓는 자리인 화사석(火舍石)을 만들고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화사석의 육면 중 양면에는 방형의 화창(火窓)이 뚫려 있으며, 좌우 2면의 중간 우각을 중심으로 인동문(忍冬文)의 화창을 투각하였는데, 이와 같은 양식의 화창은 신라석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고려전기 거란이 침입했을 때 평양에 쳐들어 온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고려군은 자혜사에 주둔하며 승리의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자신의 원찰로 지정하였다. 1561년(명종 16)에는 탄진(坦眞)이라는 승려가 소란을 피운 일이 발생했다. 그는 자혜사의 지임(持任)을 사칭하여 동료 승려를 잡아 신천(信川) 감옥에 동료를 가두었고, 지방의 행정·군사·교통 기관의 운영 경비를 보조하기 위해 설정했던 관둔전(官屯田)을 빼앗아 경작하였다. 그러나 내수사의 조사 결과는 전혀 달랐다. 내수사가 선종(禪宗) 본사를 통해 알아 본 바로는 탄진이 주지를 사칭한 적이 없고, 동료를 잡아 가둔 것도 그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아울러 둔전을 빼앗아 경작한 것 역시 탄진이 오기 전의 일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보고를 들은 왕은 더 이상 조사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 사실을 기록한 사관은 감사가 올린 문서에 죄상이 명백하게 드러났는데도 내수사가 불교계와 결탁하여 멋대로 권력을 부린다고 통분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16년 9월 18일).

변천

자혜사는 1572년(선조 5) 대웅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1716년에 작성된 『자혜사중수기』에도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지방지도에는 1871년(고종 8) 군수 어석응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해제에 언급되어 있다.

현재 자혜사에는 주불전인 대웅전과 요사채, 석등과 5층석탑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사강목(東史綱目)』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영태, 『한국불교사』, 경서원, 2008.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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