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당(資善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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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에 창건하여 고종대에 중건한 경복궁 동궁의 전각.

개설

조선초기에는 동궁이 궁 밖에 있었기 때문에 세자가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 내전 등으로 가서 국왕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듣고, 경서를 강론하는 의례를 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세종은 1421년(세종 3)에 세자를 책봉하고 1427년(세종 9) 경복궁 내에 처음으로 동궁을 조성했다(『세종실록』 9년 8월 10일).

당시 동궁의 주요 전각은 자선당으로 문종은 세자 시절을 대부분 이곳에서 지냈다. 이후 세자의 서연과 대리청정을 위한 전각으로, 1441년(세종 23) 승화당(承華堂)을 짓고 1444년(세종 25) 계조당(繼照堂)을 추가로 지었다(『세종실록』 25년 5월 12일). 계조당은 황희(黃喜)의 건의에 따라 세워졌다.

위치 및 용도

자선당은 건춘문(建春門) 안, 근정전의 동쪽에 있었다. 『세조실록』「오례」에 따르면, 세자 관련 의식은 모두 자선당에서 행하도록 되어 있다. 자선당에서 행하는 의례는 왕세자에게 정월과 동지에 백관이 하례하는 의식, 왕세자가 사부·빈객과 상견례 하는 의식, 서연(書筵)에서 진강하는 의식이 있었다. 자선당은 문종과 문종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혼전인 경희전(景禧殿)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주된 용도는 세자의 거처, 서연과 회강(會講)을 위한 장소였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자선당과 비현각(丕顯閣)을 사정전 동쪽에 나란히 배치하고 외당으로 계조당을 근정전의 동남쪽에 두었다(『고종실록』 4년 11월 8일). 또한 세자를 보위하는 시설인 춘방(春坊)과 계방(桂坊) 등 동궁 일곽의 체제를 완전하게 갖추었다. 비현각은 조선전기에는 사정전의 동월랑에 있었으며 왕이 경연과 야대를 하던 곳이었는데 고종대에는 동궁 영역에서 세자의 거처로 지어졌다.

변천 및 현황

세종대에 세자의 대리청정을 위하여 지었던 계조당은 문종의 유지에 따라 단종 즉위 직후 철거되었으므로 조선전기 동궁의 중심 전각은 자선당이었다(『단종실록』즉위년 6월 2일). 1543년(중종 38)에 화재로 소실되어(『중종실록』 38년 1월 7일) 1554년(명종 9)에 중건했는데(『명종실록』 8년 9월 28일) 이때 대제학(大提學)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지은 자선당 상량문은 당시 세자 교육에 대한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고종대에 중건했다.

자선당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경복궁에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기 직전에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불하되었다. 이후 자선당은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서 조선관이라는 박물관이 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형태

『궁궐지』에 의하면, 자선당의 규모는 정면 7칸으로 대청이 3칸, 온돌방이 좌우에 2칸이다. 공포는 이익공이다. 비현각은 규모가 12칸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에 서온돌이 2칸이며 대청이 3칸이다. 공포는 물익공으로 자선당보다 규모가 작고 건물의 격이 낮다. 두 전각은 각각 日자형의 행각으로 둘러싸였다. 비현각 남행각에 이모문(詒謨門), 동행각에 구현문(求賢門)이 있고 자선당의 내행각 남문은 진화문(震化門), 외행각 문은 중광문(重光門)이다. 근정전 안마당에서 자선당으로 가려면 숭덕문(崇德門)과 삼비문(三備門)을 통해야 한다. 동쪽에는 동궁의 외대문인 이극문(貳極門)이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
  • 『궁궐지(宮闕誌)』「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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