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조당(繼照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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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서 왕세자가 조회를 받기 위한 동궁 내의 정전(正殿).

개설

경복궁에 동궁이 조성된 것은 1427년(세종 9)이며, 이때 자선당(資善堂)과 승화당(承華堂)을 세웠다. 계조당(繼照堂)은 1443년(세종 25)에 왕세자가 신하들에게 조회를 받는 전각으로, 건춘문(建春門) 안에 새롭게 조성한 건물이다(『세종실록』 25년 5월 12일). 이때에는 왕세자의 조회를 위한 건물 조성과 함께 왕세자가 백관에게 조참을 받는 의례 절차인 의주(儀註), 정월 초하루와 동지에 백관에게 하례 받는 의주가 완성되기도 하였다.

훗날 문종이 되는 세종의 맏아들이 1444년(세종 26) 1월에 계조당에서 처음 조참을 받았다(『세종실록』 26년 1월 21일). 문종은 대리청정 동안 이곳에서 주로 조참례를 행하고 서연을 하기도 하며, 일본 사신을 만나거나 생일 축하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452년(단종 즉위) 이르러 문종의 뜻에 따라 계조당을 헐도록 하여 공식적으로 왕세자가 조하를 받는 공간이 사라졌다. 이후 1891년(고종 28)에 경복궁 중건을 하면서 계조당이 다시 조성되었다(『고종실록』 28년 3월 21일).

위치 및 용도

계조당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궁 영역에서 가장 남쪽에 해당한다. 1891년에 중건한 계조당의 위치는 「북궐도형(北闕圖形)」을 통해, 자선당과 비현각(丕顯閣)의 남쪽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1443년(세종 25)에 만들어졌으며 단종 즉위년인 1452년에 헐렸다. 이후로는 계속 존재하지 않다가 1891년(고종 28)에 이르러 다시 조성되었다.

형태

1443년에 조성된 계조당의 모습은 현재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예조(禮曹)에서 올린 왕세자의 조참 의주와 정지(正至)에 하례를 받는 의주를 통해 공간을 추측할 수 있다. 왕세자가 조회를 할 때는 계조당 중앙에 왕세자의 자리를 서향으로 설치하고 문관은 남쪽에, 무관은 북쪽에 서서 동향으로 행례하였다. 당시 세자가 남쪽을 바라보고 조회를 받는 일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남쪽으로 바라보고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왕으로 한정되었으므로 세자는 동쪽 벽에 자리하고 서쪽을 향하여 앉아 조회를 받는 것으로 차별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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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왕의 조참과 구분하여 초엄(初嚴)을 초고(初告)로, 이엄(二嚴)을 이고(二告)로, 삼엄(三嚴)을 삼고(三告)로 개칭하였다. 모두 북을 쳐서 초고에 다 모이고, 이고에 문밖에 나오며, 삼고에 뜰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이때 북을 울리기 위해 광화문의 북을 치기 어려우므로 계조당 뜰 문 밖에 따로 북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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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왕세자의 조참 의주를 살펴보면, 왕세자의 자리를 계조당 가운데 서향으로 설치하고 향로 2개를 건물 내부 앞 기둥에 좌우로 설치하였다. 종실의 백숙친과 사부, 이사의 자리는 당 안에 설치하되, 종실은 북쪽에 있고 사부와 이사는 남쪽에 서서 모두 동향으로 바라보도록 하였다. 또 문관 1품 이하의 자리는 뜰 남쪽에, 종실과 무관 1품 이하의 자리는 뜰 북쪽에 설치하여 역시 동향하도록 섰다. 봉례랑(奉禮郎)이 종실 백숙친을 인도하여 당으로 오를 때는 북쪽 계단을 이용하고, 사부와 이사를 인도하여 오를 때는 남쪽 계단을 이용하여 당으로 올랐다. 이처럼 의례를 행하기 위해서는 계조당의 좌향이 서향을 향해 있으며, 계조당의 앞마당은 계조당 서쪽에 동서 축으로 길게 마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으로 오르는 계단 또한 서쪽에 위치하여 북쪽 계단과 남쪽 계단이 구분되어 설치되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신지혜, 「17~18세기 경희궁 동궁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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