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장(茵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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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고(長興庫)에 소속되어 방석이나 자리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장인.

개설

인장(茵匠)은 인석장(茵席匠)으로도 불리고, 속칭 등메장[登每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장은 초석(草席)·유둔(油芚)·지물(紙物) 등을 관리하는 종6품 아문인 장흥고의 경공장으로서 8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도감마다 인장을 소속시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조선후기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분장흥고(分長興庫)에서 활동한 인장은 17세기에는 1명, 18세기에는 4명, 19세기에는 8명, 20세기에는 6명 내외였다. 이들 인장은 시기별로 처지가 달라졌다. 곧 17세기 중엽에는 훈련도감 소속 군문(軍門)의 인장이 징발된 이후 18세기 중엽 영조대까지는 장흥고 소속 관장(官匠)이 차출되었다가, 18세기 말부터는 모두 사적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私匠)이 동원되었다.

담당 직무

장흥고의 인장은 등메석[登每席]을 짜고 궁궐의 전각 내부나 왕릉의 정자각 및 왕실의 행사가 거행되는 공간에 맞춰 재가공하는 다음과 같은 신역(身役)을 수행하였다.

첫째, 궁궐의 전각 내부 전돌 바닥이나 마룻바닥 위에 이중의 지의(地衣)를 제작하여 깔았다. 지의는 여러 장의 부들자리나 왕골자리를 전각의 크기나 공간의 크기에 맞추어 서로 잇대어 하나로 만들어 까는 일종의 깔개를 제작하였다.

둘째, 정전이나 편전 내 왕이 앉는 당가(唐家)와 어좌(御座), 침전 내 평상(平床) 등에도 가구의 크기에 맞게 이중의 자리를 제작하여 깔았다.

셋째, 왕실의 각종 의례 행사 공간에 자리를 제작하여 깔았다. 예컨대 산릉도감의 분장흥고에 소속된 인장이나 인석장이 정자각에 깔 백문석(白紋席), 별문석(別紋席) 등을 제작하여 이중의 지의로 깔았다. 재실의 마루에도 자리를 깔았다.

변천

조선전기에 장흥고에 인장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그 활동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조선후기에 왕실의 행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권설도감마다 인장을 징발하고 있었다. 특히 왕이나 왕후의 사후 왕릉을 조영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산릉도감에는 분장흥고가 설치, 운영되면서 인장이 동원되었다.

분장흥고에 소속된 인장은 정자각 전돌 바닥이나 재실의 마룻바닥 및 평상 위에 배치할 자리를 장흥고나 각 지방의 석장들이 복정(卜定)하여 마련된 자리를 갈무리하기 위해 동원하였다.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에 의하면 17세기 초 왕릉 정자각 내부 전돌 위에 깔 자리는 백문석 468장·별문석 106장·초석(草席) 343장·유문석(有文席) 33장·채화석(彩花席) 10장 내외가 소요되었다. 그러다가 17세기 말 숙종대부터 18세기 영·정조 시대에는 그 수량이 조금 줄어 백문석 450∼500장·별문석 100장 내외·초석 280장 내외·채화석 13장 내외였다. 특히 숙종 때부터는 유문석이나 황화석(黃花席)을 조달하지 않았다. 19세기 왕릉에서는 수량이 2배 이상 늘어 백문석 750∼850장 내외·별문석 150장 이상·초석 350장 이상을 사용하였으며, 용문석(龍紋席) 1장·채화석 15장 내외를 별도로 들이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17세기보다 18세기에 자리의 종류와 수량이 줄어들었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 종류가 늘고 수량도 1.5∼2배 이상 불어났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 장경희, 「조선후기 산릉도감의 장인 연구」, 『역사민속학』 25호, 2007.
  • 장경희, 「대한제국 홍릉 침전 내부의 공예품 연구」, 『한국공예논총』 13-2호, 2010.
  • 장경희, 「조선후기 왕릉 정자각 내부 의물 연구」, 『역사민속학』 3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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