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법(里定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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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리 내에서 군액에 결원이 생길 경우 그것을 채우는 책임을 면·리 전체가 지는 제도.

개설

이정법은 양역변통(良役變通) 과정에서 결원이 생긴 군역을 이웃이나 가족에게 대신 지우는 인징(隣徵)·족징(族徵)과 같은 불법적인 행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기되었다. 양역변통은 만성적인 군액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군역 대상자인 양정을 찾아 모으는 작업[良丁收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앙정부는 군역자가 소속된 국가기관들의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군역자 확보 활동을 금지하는 대신에 호적 편성에 기초하여 군역 대상자에 대한 파악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관청도 군역 대상자 개개인을 찾아내어 수시로 발생하는 군역의 결원을 즉각적으로 채우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지방관청이 군액을 채우는 과정에서 부작용도 발생하였다. 아직 군역을 질 나이가 아닌 어린아이에게 군역을 부과하거나 이미 사망한 자에게 계속 군포를 징수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인징·족징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조정에서는 지방의 최하 행정단위를 이용하여 군정(軍丁)을 차출하는 방식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고자 하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정법이었다. 이정법도 궁극적으로는 피역(避役)이나 투속(投屬)에 의하여 군역에서 빠져나가는 자들을 찾아내어 군역을 징수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인징·족징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방법 면에서 공동체의 연대책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이정법에서 비롯된 이징법(里徵法)은 리를 단위로 하는 공동납부 형태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7세기 후반부터 군역 징수를 둘러싼 대대적인 개혁이 논의되었다. 개혁은 중앙기관에서 일원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군사 기관을 포함하여 행정을 담당하는 여러 국가기관에서도 분산적으로 추진되었다.

군역은 원칙적으로 16세~60세의 양인 남정에게 부과되었고, 그 부담은 균등하지 않았다. 군역자가 소속된 국가기관들은 더 많은 군역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군액을 늘리거나 새로운 역종을 창출하여 지방 수령에게 군역자 색출을 요구하였다. 어떤 역종에 대해서는 군역 부담을 낮추어 더 많은 군역자를 모집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무리한 군역 확보 노력의 결과로 한 사람이 2개 이상의 군역을 갖게 되거나 실제로 군포를 징수할 수 없는 허구의 인물들로 군액을 채우는 사태도 일어났다.

이에 중앙정부는 각종 국가기관의 경쟁적 군액 증가 시도를 불법적인 ‘사모속(私募屬)’으로 규정하고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군역자 확보 활동을 억제하였다. 한편,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한 군역자의 결원을 실제로 군역을 부담할 수 있는 새로운 군역자로 충당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물론 이때에도 군역 대상자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17세기 말부터 군역 예비자를 확보하는 양정수괄(良丁收括)과 소속별·역종별 군액의 정족수를 재확인하는 군역 정액(定額) 작업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군역정책 과정에서 전자의 양정수괄을 목적으로 하는 군역자 확보 방안의 하나로 이정법이 제안되었다.

내용

1711년(숙종 37)에 판중추(判中樞)이유(李濡)는 양역변통과 관련해서 호포(戶布)·정포(丁布) 대신 이정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정법을 시행해야 하는 이유로, 다음 몇 가지를 들었다.

구수(口數)에 따라 호의 대소(大小)가 나뉘고 남정 수에도 차이가 있어 수포(收布)의 양이 이것으로 결정되는데, 민간에서 큰 것을 작게 만들고 많은 것을 적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호적의 법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 이전까지는 양반에게 포를 징수하지 않았는데, 이제 평민과 똑같이 수포한다면 원망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먼저 사망 증명서 규정을 개정하여, 도망으로 부족해진 군역 액수를 해당 리(里)로 하여금 공론에 따라 대정(代定)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정법의 구체적인 시행 방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그 핵심 내용이 제시되었다.

모든 군사는 사망한 후에도 사망 증명서를 얻기 전까지는 계속 군역 징수 대상이므로, 이것이 이른바 백골징포(白骨徵布)의 폐단이 된다. 보고서를 올릴 때 드는 비용이 많은데, 죽은 자의 족속은 가난하여 이를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 혹 힘이 있는 부유한 백성은 군역을 지던 자식이 죽었다고 거짓 사칭하여 아전과 보증해 주는 세 이웃인 3절린(三切隣)과 결탁하여 사망 증명서 내기를 도모하는 자도 있다. 만약 이 법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비록 아전들이 뇌물을 받는 습관을 다스리고자 하더라도 이것을 막을 길이 없다.

이제 죽은 자의 부모나 친척이 증명하는 제도와 보고서를 올리는 규정을 혁파하고, 해당 리마다 군역 대정을 담당하는 유사(有司)를 선정하여 그로 하여금 군역자의 사망 사실을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 유사는 군역자가 사망하는 대로 즉시 ‘어느 면, 어느 마을, 무슨 군역, 누가, 어느 달, 어느 날에 병으로 죽었다.’라고 쓰고 서명한 다음, 면의 풍약(風約)에게 보고하도록 한다. 풍약은 즉시 조사하여 사망을 확인한 후에 함께 연명(聯名)해서 수령에게 보고하고 아울러 유사의 서명과 같이 붙여서 보고한다. 수령은 한편으로는 이 보고 내용을 해당 아문(衙門)에 보고하고 한편으로는 그 동네의 임장(任掌)에게 주민 모두를 모아 공론에 따라 대정에 합당한 자를 추천하게 한다. 만약 대정에 합당한 자가 없다면 그들로 하여금 이웃 동리에서 찾도록 하고 차례로 한 면에까지 이르게 하여 반드시 충당한다.

이렇게 하면 해당 리 안에 혹시나 실제로 사망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도 대정당한 자가 반드시 말을 할 것이고, 합당한 자가 있는 데도 이웃 마을에 이정하면 그 이웃 동네에서 대신하기를 즐겨하지 않아 다투어 서로 고할 것이다.

해마다 군액에 맞추어 군역자를 충당하는 세초(歲抄)를 실시할 때에, 한정(閑丁)을 찾아내는 것은 한 고을 전체를 소란스럽게 하였다. 이때 해당 색리(色吏)가 농간을 부려 뇌물을 받아 조종하여도 수령은 알아차리지 못하여 그 폐단이 끝이 없었다. 이제 다만 각각 해당 리로 하여금 대정하게 하면 일이 간단해서, 관리가 농간을 부리는 폐단도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혹시 한 동네의 남정이 모두 소속된 곳이 있어 한정을 찾지 못하고 그 동네에서 후보자를 추천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러면 우선 향청(鄕廳)작청(作廳)에 소속된 자와 같이 지방관청에서 유용할 수 있는 자를 대정시킨다. 감영(監營) 및 병영, 중앙의 각 관서 소속에 이르러서도 역시 이러한 예에 의거하여 차차로 대정한다.

이유는 이정법과 함께 교생(校生)의 군역 충정에 대해서도 의논을 제기하였다. 교생 중에는 군보의 자제이지만 군보의 이름을 피하여 함부로 소속된 자들이 있으며, 이들을 군역으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주장이 팽배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유는 경서를 외우는 시험에서 떨어진 낙강교생(落講校生)을 바로 군역 정역(正役)에 충정하지 말고 속포(贖布)를 내게 하여 군역 대정을 다 하지 못한 군현의 부족한 군포에 충당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유가 제안한 이정법의 내용은 『거관대요(居官大要)』등의 목민서에 「이정절목(里定節目)」, 「이정보초(里定報草)」 등으로 기재되어 수령의 지방 통치를 위한 지침이 되었다.

변천

이정법과 이징법은 관의 일률적인 강제에 기인한다는 측면에서 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지역에 따라서는 지방 주민의 자발성에 기인하는 공동납 형태로 진행되었다. 즉, 계(契)를 만들어 호 단위로 분담시키거나 토지에 부과하였으며, 때로는 기금을 마련하여 군포계(軍布契)의 형식으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종래 군포 수납에서 면제되던 양반이나 중인도 공동으로 부담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러한 리 단위의 공동납은 이후 더욱 발전하여 이포(里布)·동포(洞布) 등의 제도로 정착되어 대원군 때 실시된 호포제(戶布制)의 단서를 열어 주었다.

참고문헌

  • 『거관대요(居官大要)』
  • 『조선민정자료(朝鮮民政資料)』 목민편(牧民篇)
  • 구완회, 「조선후기 軍役釐政의 方向과 守令」, 『조선사연구』 1, 북현조선사연구회, 1992.
  • 김준형, 「18세기 里定法의 展開; 村落의 기능 강화와 관련하여」, 『震檀學報』 58, 진단학회, 1984.
  • 송양섭, 「19세기 良役收取法의 변화; 洞布制의 성립과 관련하여」, 『韓國史硏究』 89, 韓國史硏究會, 199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