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승장(義僧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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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에 승군을 지휘한 우두머리 승려.

개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들은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해 왜군에 맞섰다. 승군(僧軍)의 지휘관인 의승장(義僧將)은 전국 각지에서 승병을 모집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고 전황의 흐름을 돌려놓기도 하였다. 전란 이후에는 외적을 방비하기 위한 산성의 축조와 경비를 비롯해 각종 국가적인 차원의 토목 공사에 동원된 승려들을 통솔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점차 승군의 가치와 효용성을 인정하여 이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의승장으로 하여금 이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내용 및 변천

조선시대의 의승장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등장하였다. 선조의 명을 받은 휴정(休靜)은 전국 각지의 승려들을 총동원하여 전란에 참여하였는데, 선조는 그를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으로 임명해 승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휴정은 전국의 사찰에 사발통문을 띄워 승군에 참여하기를 권유하였다. 이로 인해 의승군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당시 승군의 총본부였던 순흥의 법흥사(法興寺)에는 5,000여 명의 승군이 집결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중앙에 최고 지휘관인 도총섭을 두고 그 아래로 전국 8도에 각각 2명씩 총 16명의 총섭을 두어 이들로 하여금 승군을 지휘 통솔하게 하였다. 대체로 휴정의 제자들이 총섭이 되어 승군들을 통솔하였다. 이들은 조선군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한편 군량 운송과 산성 축성 등 후방 지원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승병들이 활약한 전투는 대개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과 그 이듬해에 집중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첫해에는 영규(靈圭)가 지휘한 승군이 의병장 조헌(趙憲)의 군대와 합류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는 휴정과 그의 제자 유정(惟政)의 군대가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여하였다. 처영(處英)은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해 활약을 펼쳤다. 한양을 수복한 뒤에는 휴정이 100여 명의 승군을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왕의 행렬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휴정은 제자 의엄(義嚴)을 부총섭(副總攝)으로 임명하여 무기와 군량을 마련하고 승군을 모집하게 하였으며, 유정을 의승군 도대장(都大將)에 임명하여 실전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1593년 8월 조정에서 팔도의 승군을 총괄하는 총섭제를 시행하면서 전국 8도의 교종판사와 선종판사의 명칭을 총섭으로 바꾸어 각각 좌·우 총섭으로 십육종총섭(十六宗摠攝)을 임명하였으며, 총섭으로 하여금 의승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26년 8월 7일). 조정에서 판사라는 명칭 대신 총섭이라는 명칭을 내린 것은 선교양종의 부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양을 수복한 뒤 휴정은 노령(老齡)을 이유로 의승장의 소임을 사직하고 승군의 지휘를 유정과 처영에게 맡기고는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후 전란이 끝난 뒤 의승장은 각종 능원(陵園)사고(史庫)가 위치한 중요 지역을 수호하거나,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된 승군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 김덕수 편, 『임진왜란과 불교의승군』, 육군본부 군종감실, 1992.
  • 김영태, 『임란구국의 승장들』,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79.
  • 안계현 역, 『사명대사임란기』,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93.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강형광, 「조선중기 불교계와 의승군」,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 김갑주, 「조선후기의 승군제도」, 『조선시대사연구 : 용암차문섭교수화갑기념논총』, 1989.
  • 양은용, 「임진난과 호남의 불교의승군」, 『한국종교』19, 원광대학교 종교문화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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