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지(尹衡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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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4년(선조 37)∼1634년(인조 12) = 31세.] 조선 중기 인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이고, 증직(贈職)은 3품 당상관(堂上官)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충청도 임천(林川) 출신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자는 경가(景可)이다. 증조부는 내자시(內資寺) 판관(判官)윤청(尹淸)이며, 조부는 사옹원(司饔院) 참봉參奉)을 지내고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윤민신(尹民新)이다. 아버지는 승지(承旨)윤길(尹)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세량(李世良)의 딸이다. 윤형성(尹衡聖)의 형이다. 북저(北渚)김류(金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수학하던 중,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후금(後金)의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명의 기병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후금의 군사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단숨에 건너서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용천(龍川)·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어서, 평양(平壤)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공격하였다. 조선 정부에서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후금 군사와 싸웠으나, 평산(平山)에서부터 개성(開城)으로 후퇴를 거듭하였다.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의 관리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다.

유생(儒生) 윤형지는 임금을 따라서 강화도로 피난 갔다. 황주를 공략한 후금의 아민은 부장 유해(劉海)를 보내어 조선에 강화(講和)할 것을 요구하였다. 권신(權臣) 최명길(崔鳴吉)이 강화의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양국이 강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때 성균관 유생 윤형지는 척화(斥和)의 상소를 올려 강화를 배척하고, 화의를 주장하는 최명길을 공박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윤황(尹煌)윤지경(尹知敬)도 척화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삼윤(三尹)의 정기(正氣)’라고 칭찬하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1629년(인조 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승문원 박사(博士)로 승진하여, 봉상시(奉常寺)직장(直長)을 겸임하였다. 1630년 사관(史官)으로 천거되었으나, 최명길의 반대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구토하고 설사하는 전염병에 걸려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니, 그때 나이가 겨우 31세였다.

성품과 일화

윤형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겉모습은 조용하고 침착하여 말이 적었으나, 속마음은 실로 굳건하고 깨끗하였다. 8~9세 때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10세 때에 아버지와 함께 제천정(濟川亭)에 올라가서 시(詩)를 지었는데, 운자(韻字)에 따라서 짓는 싯구(詩句)가 뛰어났으므로, 좌중의 손님들이 그 영리함에 감탄하였다. 11세 때 어머니 상(喪)을, 12세 때 아버지 상을 연달아 당하여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부짖는 정도가 어른보다 지나쳤다. 이로 인해 몸이 야위고 슬퍼하다가 고질병을 얻어서 능히 학업에 전업(專業)하지 못하였다. 16세 때 북저김류를 찾아가서 수학하였는데. 정승 김류가 그 재능을 특이하게 여겨 칭찬하기를, “선비가 글을 배우는데, 이와 같이 빠르게 진전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염헌집(恬軒集)』 권31「승문박사 윤공형지 묘비명(承文博士尹公衡志墓碑銘)」)

1796년(정조 20) 4월 정조가 전교하기를, “고 박사윤형지의 척화에 대한 상소는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 충신인 담암(澹菴)호전(胡銓)에 뒤지지 않으니, 아직까지 추증하는 은전을 거행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특별히 3품을 추증하라.” 하였다.(『정조실록(正祖實錄)』 참고.) 그리하여 정조 때 윤형지에게 3품 당상관(堂上官)을 증직하였으나, 그 관직 이름을 실록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찾을 수 없다.

그해 7월 『존주록(尊周錄)』을 편집할 때 정조가 그 편찬하는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이번에 증직한 윤형지는 이 책에 넣지 않을 수 없다. 윤황은 맨 먼저 척화를 주장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영의정에 증직하였는데, 더구나 윤형지의 상소가 윤황의 상소보다 더 앞서 있지 않았는가? 그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상소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는데, 그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서 일생을 마쳤다. 이것이 이 사람에게 특별히 추증을 시행한 까닭이다. 나는 이 사람이 삼학사(三學士)와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였다.(『정조실록』 참고.) 정조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이 많은 광국공신(光國功臣) 등을 기록한 『존주록』을 편찬하면서, 정조가 이 책에 윤형지의 충절(忠節)을 추가로 넣었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신림동(新林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염헌(捻軒)임상원(任相元)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염헌집(恬軒集)』 권31「승문박사 윤공형지 묘비명(承文博士尹公衡志墓碑銘)」) 1796년(정조 20) 3품 당상관으로 추증하였다. 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유양증(兪養曾)의 딸인데,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예천 군수윤매(尹梅)이고, 차남은 윤백(尹栢)이며, 3남은 군수윤송(尹松)이다. 1녀는 참봉(參奉)이세응(李世膺)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염헌집(恬軒集)』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백주집(白洲集)』
  • 『시남집(市南集)』
  • 『우사집(雩沙集)』
  • 『직재집(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