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견(尹起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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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전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부수찬(副修撰)봉상시(奉常寺)판사(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윤기무(尹起畝)라고도 한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을 지낸 윤응(尹應)이고,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판사(判事)를 지낸 권소(權紹)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및 호조 전서(典書)에 오른 윤득룡(尹得龍)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군사(郡事)를 지낸 윤희(尹禧)이다. 세종 때에 주로 활동하였으나, 사후에 딸이 성종(成宗)의 계비(繼妃)가 되어 아들 연산군(燕山君)을 낳으며 외척이 되었고, 연산군 때에 영의정까지 추증 받았지만 중종(中宗) 때에 삭탈 당했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39년(세종 21)에 친시(親試) 병과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세종실록(世宗實錄)』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으며,[『세종실록』 부록] 문종(文宗) 때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부검토관(副檢討官), 사경(司經)을 지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에 참여하여 노숙동(盧叔仝)·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이예(李芮)·윤자운(尹子雲) 등과 기(紀)·지(志)·연표(年表)를 찬술(撰述)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7일),(『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3일),(『문종실록』 1년 6월 12일),(『문종실록』 2년 2월 20일) 단종(端宗) 때에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제수 받아, 인사 및 불사(佛事)에 관한 일로 간쟁하였다.(『단종실록』 1년 11월 8일),(『단종실록』 1년 11월 26일),(『단종실록』 2년 1월 7일) 세조(世祖) 때에는 2등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성종(成宗) 때에 딸을 숙의(淑儀)로 궁에 들여보냈다.(『성종실록』 4년 3월 19일) 이에 함안군(咸安君)으로 칭해졌는데,(『성종실록』 7년 9월 5일) 그 해에 부인 신씨(申氏)가 과부가 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 그리고 딸 윤씨(尹氏)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다는 말로 보아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이미 영의정을 증직 받은 상태였다.(『성종실록』 7년 12월 6일),(『연산군일기』 1년 3월 16일)

성품과 일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인 윤씨가 폐위되어 죽은 것을 알게 된 계기에는 윤기견이 관련되어있다. 1495년(연산군 1)에 연산군이 성종의 묘지문을 보고 봉상시 판사윤기견이라는 이가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윤호(尹壕)를 잘못 쓴 것이냐고 물었을 때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들이 폐비윤씨의 아버지인 윤기견이라고 답했다. 이에 연산군이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연산군일기』 1년 3월 16일) 그리고 2년 뒤 연산군은 윤기견과 신씨 내외 족속의 성명을 모두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연산군일기』 3년 12월 9일)

후손

첫째 부인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온(李蒕)의 딸로 슬하에 3남을 두었다. 1남은 윤우(尹遇)로 부윤(副尹)을 지냈고 연안 김씨(延安金氏)김숭(金崇)의 딸과 혼인했다. 2남은 윤해(尹邂)이고, 3남은 윤후(尹逅)로 참판(參判)에 올랐다. 둘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정언(正言)신평(申枰)의 딸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참판에 오른 윤구(尹遘)이고, 1녀는 폐비윤씨이다.

폐비윤씨, 즉 제헌왕후(齊憲王后)는 성종의 계비로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남편 성종과 시어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와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서인 된 후 사사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