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부(留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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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한성 방어의 요충지에 설치한 지방 행정 기구.

개설

유수부는 장관으로 유수가 파견된 지방 행정 기구이다. 개성유수부는 조선초에 설치되어 인조 초까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통치하였다. 인조대 이후에 설치된 강화·광주·수원유수부는 기존의 개성유수부와 조선말까지 서울인 한성을 외곽에서 방어하고 관할 지역을 통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유수부는 당나라 제도에서 기원한다. 당나라와 송나라는 전 왕조의 수도를 우대하고 수도 방어를 위해 수도 외곽의 거점에 유수부를 설치했다. 조선은 이 제도를 도입했다. 국초에 백제의 수도였던 완산,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신라의 수도였던 계림을 유수부로 삼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다만 1438년에 1395(태조 4)에 고려의 서울이라 하여 특별히 유후사로 만들었던 개경유후사를 개성부로 승격하고 유수를 파견했다(『세종실록』 20년 10월 15일). 이로써 개성은 개성유수부가 되었다. 그 후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후에 수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강화부에 유수부를 설치하고, 이후 1795년(정조 19)까지 수원, 광주에 추가로 설치하여 수도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 유수부 체제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수반된 관제개혁으로 8도-부윤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의 지방통치체제가 23부-438군으로 개편되기까지 계승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의하면 개성부유수부에는 종2품 유수 2명, 종4품 경력과 종5품 도사 각 1명, 종6품 교수 1명, 서리 40명을 두었다. 유수 1명은 경기도관찰사가 겸임했다. 또 개성부유수는 외관(外官)이 아닌 경관(京官)으로 도의 행정 체계에서도 비교적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것은 경기도관찰사가 유수를 겸한 것과 함께 개성유수부의 중앙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방지하는 한편 도 단위의 지원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후에 설치된 강화·광주·수원유수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한편 인조대 이후에는 강화를 위시하여 수원, 광주, 춘천이 차례로 유수부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강화부윤부(江華府尹府)를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속대전』에는 강화유수부에는 종2품 유수 2명, 경력 1명, 서리 40명을 두었다. 개성부는 그대로 계승하였다. 행정 실무는 경력이 담당했다. 도사는 아전들의 불법을 규찰하고 지방민의 풍속을 단속했다. 조선전기에는 무신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문신으로 임명하다가 1637년에 폐지하고 유수가 직접 관장하게 했다.

이어 1793년(정조 17)에는 수원유수부를 설치하여 화성을 관장시키고, 1795년에는 광주유수부를 설치하여 남한산성을 관장하게 했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수원과 광주의 유수는 정2품이며, 종5품 판관 1명, 종9품 검률 1명을 두었고 서리는 수원부에 90명, 광주부에 80명을 두었다. 원래는 판관 대신 별관을 두어 경력과 도사를 대신하게 했는데, 정조대에 판관으로 대체하였다.

또 1888년(고종 25)에 춘천도호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정2품 유수 이하 관원을 두었다. 소속을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옮기고 그 안에 별궁을 지어 위급 시 조정의 피난처로 정하였다.

『속대전』에 따르면 유수는 의정부에서 후보자를 추천했다. 유수부의 낭관은 유수가 천거하고 이조(吏曹)의 동의를 얻어 임명했으며,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署經)을 받아야 했다. 유수는 이들의 근무 성적을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두 차례에 걸쳐 보고했다. 그 결과 관찰사와 유수가 상피(相避) 관계에 있으면 유수를 교체하였으며, 진무영의 영장을 겸한 수령도 유수와 상피하게 함으로써 군사적 결속을 방지했다.

유수부의 군사적 기능과 운영

개성은 고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유수부가 되었으며 동시에 개성유수부는 고려 왕릉의 보호와 제사가 주된 임무였다. 따라서 이곳의 재정은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후기로 오면 병자호란의 경험과 이양선의 위협, 군내 반란의 위험을 경계하여 도성 방어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한성은 너무 넓고 열린 지형이어서 도성과 북한산성만으로는 방어가 곤란했다. 게다가 인구가 너무 많아 수성전을 유지할 식량과 가축을 저장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도성 외곽에 방어 중심지를 만드는 방안이 채택되었고, 이것이 유수부 체제로 발전했다.

따라서 개성부에는 관리영, 강화부에는 진무영, 수원부에는 장용영, 광주에는 수어청을 설립했다. 장용영은 뒤에 총리영으로 바뀌었다. 4영의 영사는 유수가 겸임했다. 그 휘하에는 정3품의 중군, 별장, 천총, 백총, 파총, 초관이 있었다. 강화부와 개성부는 전세(田稅)와 대동미, 군포를 전적으로 유수부에서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유수부의 군사적 기능은 조금씩 달랐다. 도성 방어를 위한 군사 요충지로는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가 중시되었다.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유사시 왕의 피신처로도 사용되었다. 반면 수원부는 화성행군이 있는 곳으로 왕의 친위 세력과 친병(親兵)을 양성하기 위한 곳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이왕무, 「화성 축조와 장용영 창설」, 『한국군사사』7, 육군본부, 2012.
  • 이존희, 「조선 왕조의 유수부 경영」, 『한국사연구』47, 1984.
  • 한충희, 「조선 중·후기 군현의 변천과 국방·지방통치」, 『인문학연구』45, 계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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