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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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사고를 수호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오대산의 절.

개설

자장(慈藏)은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였다. 이곳에 허름한 움막을 지었고 뒤이어 신의(信義), 유연(有緣), 신효(信孝) 등이 머물며 법등을 이어 나갔다.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 절은 작은 암자의 모습으로 명맥을 유지해 나갔을 뿐 당시의 절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오대산이라는 이름은 중국 화엄종의 중심지인 중국 산서성(山西省) 청량산(淸凉山)의 별칭이다. 중국오대산을 순례할 당시 깊은 영감을 받은 자장이 귀국 이후 한반도에도 문수보살 성지를 세우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이 산의 이름을 지은 듯하다.

이후 강원도오대산은 다양한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 성지신앙으로 확대되었다. 절 이름은 오대산의 동대(東臺)에 있었던 수정암(水精庵)을 이전하여 중창하면서 만월산(滿月山)의 ‘월’과 수정암의 ‘정’을 따서 새롭게 정했다고 전한다. 조선중기에는 오대산 영감사에 왕실의 역사서와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두었고, 월정사가 이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본산으로서 강원도의 대표 사찰이 되었고,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전소되었다가 다시 중창하였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제4교구 본사이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시대

8세기 이후 고려시대까지 절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유물로 전하는 두 가지 자료를 통해 고려시대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먼저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은 8각의 기단과 탑신, 온전한 모습의 상륜부 등에서 고려전기 불교예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당시 절의 사세가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월정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또 다른 자료는 월정사사시장경비(月精寺社施藏經碑)이다. 1339년(고려 충숙왕 복위 8) 절에 대장경을 시주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후기의 『대동금석서』에 탁본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1339년 월정사에 대장경을 봉안하는데 왕비가 백금을 하사하였고, 원나라에서 환관을 지냈던 신안군(信安君) 이안수(李安修)도 백금 두 덩어리를 시주하였으며 당시 재상의 부인 김씨 등도 여기에 동참하였다는 내용이다. 고려후기 월정사에는 대장경을 봉안한 전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대장경을 봉안할 정도라면 여타의 전각은 물론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상당한 규모의 가람을 이루고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대장경의 봉안 법회에 5,000명의 대중이 모였다는 사실에서도 월정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2) 조선전기

조선은 새로운 왕조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수립하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건국 초부터 불교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태조를 비롯하여 태종·세종·세조 등은 정치적으로는 배불 시책을 단행하면서도 왕실의 개인적 신불 활동은 계속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초기의 오대산 불교는 국왕의 신불 활동으로 오히려 전시대보다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조선초기 오대산 불교의 중심은 상원사였다. 1401년(태종 1) 봄 태종은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하여 원찰로 삼았다. 10월에는 상원사에서 고려 왕실의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를 열도록 하였다. 세조는 1465년(세조 11)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에게 상원사를 중창하도록 하여 역시 원찰로 삼았다. 왕실의 원찰로서 상원사의 번성은 예종대에도 계속되었고, 이처럼 상원사를 중심으로 오대산의 불교는 계속되었다. 상원사는 조선초기부터 왕실의 원찰이 되어 사격이 높아갔지만 이 무렵의 월정사의 역사는 의외로 전하는 사실이 많지 않다.

1483년(성종 14) 당시 절에는 행겸(行謙)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이 무렵 봉선사의 주지를 맡고 있던 학조(學祖)가 왕에게 행겸을 한양으로 불러들여 일을 함께 할 수 있도록 건의하였다(『성종실록』 14년 6월 16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떤 일인지 언급하지 않았으나 아마도 경전을 번역하는 일이라 짐작된다. 학조는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여러 고승들과 함께 많은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그가 국역한 경전으로는 『지장경언해』를 시작으로 수양대군이 완성한 『금강경삼가해언해(金剛經三家解諺解)』를 인출하였다. 1476년에는 『천수경』을, 1482년에는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을 번역하였다. 이처럼 학조는 조선초기 여러 불전의 언해에 종사하면서 당시 교학이 출중했던 월정사의 행겸을 언해 사업에 천거하였다.

1502년(연산군 8) 월정사는 강원도에서 매년 소금 수십여 석을 제공받았다. 당시 강원도는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월정사·낙산사·유점사 등에 매년 소금 200여 석을 지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성들을 시켜 소금을 운반하게 하였고, 정한 수량에서 모자라면 절에서 백성들을 다그치는 등 폐해가 크다고 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8월 12일). 그 개선안으로 소금의 양을 줄이거나 절의 승도들이 직접 운반하게 하라는 건의가 이루어졌다.

1551년(명종 6)에는 조정에서 월정사 인근에서의 수렵을 금지하는 푯말 문제가 논의되었다. 명종은 월정사 등의 사찰 토지 출입금지 푯말을 허락하였다(『명종실록』 6년 1월 18일). 여기에서 말하는 출입금지 푯말은 절 관계자 이외의 관리나 백성이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산림보호 등의 푯말을 말한다. 보통 ‘◯◯사시장(寺柴場)’이라고 써 붙여 절의 땔감 채취장임을 나타낸다. 억불의 사회에서도 사유림과 같은 절의 재산은 일정한 보호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59년(명종 14)에는 절의 계곡에서 수렵을 금지하는 푯말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다(『명종실록』 14년 2월 17일). 청정한 수행 환경을 유지시키기 위해 어로 금지의 전통을 이어나가도록 하였다.

16세기 초 박광우(朴光佑)가 지은 「강릉 월정사」라는 시가 있다. 시의 내용 가운데 "종 울리자 갑자기 문수회가 시작되니[鍾鳴忽作文殊會]"라는 구절이 있다. 강릉부사로 재임하던 1545년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시의 내용을 통해 당시 월정사에는 문수회 즉 문수결사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월정사의 창건 배경에 문수신앙이 크게 자리 잡았고, 이때까지도 문수신앙은 문수회라는 결사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조선중기

1589년(선조 22) 사명당(泗溟堂)유정(惟政)이 월정사를 중건하였다. 서산 대사 휴정의 법을 이은 대사는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의승을 일으켜 꺼져가는 국운을 되살렸고, 왜란의 와중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3,300여 명의 동포들을 구해내기도 하였다. 1587년 사명당은 퇴락한 월정사를 중건하기로 발원을 세웠다. 5년의 긴 세월 동안 마침내 법당을 중건하고, 그 과정을 「월정사법당개연소문(月精寺法堂開椽疏文)」에 자세히 적었다. 1606년(선조 39) 4월 조정에서 오대산의 영감사(靈鑑寺)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오대산사고(史庫)를 건립하였다. 건립 공사는 강원감사가 맡았으나 당시 사명당이 월정사에 있었으므로 선조가 그에게 제반 공사를 맡겼던 것 같다. 사고의 설치 이후 월정사의 주지는 사고의 수호를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4) 조선후기

1744년(영조 20) 절에 화재가 일어나 전각이 크게 손상되었다. 얼마 후 왕실의 지원을 받아 중건하였고, 1752년(영조 28)에 월정사중건사적비를 건립하였다. 이 무렵의 월정사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그림이 있다. 1788년(정조 12) 9월 김홍도(金弘道)는 오대산과 금강산 등을 직접 답사하여 70여 장의 산수화를 그려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을 남겼다. 이 중에 월정사를 비롯하여, 상원사와 중대 적멸보궁, 그리고 사고의 그림이 각각 1장씩 들어 있다. 「월정사」의 그림은 팔각구층석탑을 중심으로 20동의 전각, 그리고 부도밭까지 확인할 수 있어 18세기 후기의 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생생한 자료이다.

(5) 근현대

1902년 월정사는 강원도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다. 수사찰이란 사사관리서가 제정한 16개의 중법산(中法山)을 말한다. 1902년 국가에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원흥사(元興寺)를 창설하였고, 실무 관리 부서로서 사사관리서를 두었다. 원흥사를 대법산으로 하고, 전국에 16개의 중법산을 두었다. 이때 강원도의 중법산으로 유점사와 월정사가 선정되었다.

근대 시기에 들어 월정사는 이처럼 강원도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고, 1911년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31본산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총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절은 전소되고 말았다. 칠불보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광응전 등 21개 동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고, 많은 성보와 문헌들도 잿더미로 변했다. 1953년 빈터에 60여 평의 인법당을 지었고, 1957년에는 서승당 터에 50여 평의 함석집을 지었다. 1964년에는 각고의 노력 끝에 적광전을 중건하였고, 1969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이후 고승들의 노력으로 꾸준히 중건, 오늘날의 대가람을 이어오고 있다.

참고문헌

  • 『성호사설(星湖僿說)』
  • 『사명대사집(四溟大師集)』
  • 월정사, 『월정사 성보박물관 도록』, 월정사 성보박물관, 2002.
  • 이도흠, 『오대산 월정사 이야기: 달을 품고서 일체를 아우른 절』, 민족사, 2013.
  • 한국불교연구원 편, 『월정사 (부)상원사』, 1977, 일지사.
  • 한상길, 『한국의 명찰 5 월정사』, 대한불교진흥원, 2009.
  • 신종원, 「신라오대산사적과 성덕왕의 즉위배경」, 『최영희선생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198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