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사의(雩祀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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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우사단에서 시행했던 제사 의식.

개설

조선시대 우사단에서의 제사의식은 1414년(태종 14) 흥인문 밖에 우사단이 세워지고, 10여 일 후에 첫 번째 제사가 시행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국가 사전(祀典)에서의 등급은 중사(中祀)이다. 우사단에서 시행되는 제사의식은 『세종실록』「오례」 길례 의식에 ‘우사의(雩祀儀)’라는 명칭으로 실린 이후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내용의 일부가 수정되어 실렸고, 이후 정조대의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다시 수록됨으로써 조선 전 시기에 준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중국사에서는 우사제(雩祀祭)는 2가지 부류의 종류가 있었다. 첫 번째는 환구단에서 시행되는 기우제이고, 다른 것은 우사단에서 시행되는 기우제였다. 전자는 선진(先秦)시대부터 시행되어 유래가 깊고, 후자는 남북조(南北朝)시대부터 시행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환구단에서 시행되는 기우제는 송대 이후 대우(大雩)라는 명칭으로 국가 제사 체계에서 대사(大祀)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위와 같은 중국의 전례(典禮)에서 전자의 것만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우사환구(雩祀圜丘)’의 형태로 환구단에서 시행된 제사만 기록되어 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이런 방식은 일정 기간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환구제가 천자의 의례로 제후국인 조선에서 시행할 수 없다는 비판론이 나오면서 이곳에서의 기우제를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그 결과 1414년(태종 14) 흥인문 밖에 우사를 지낼 별도의 제단인 우사단이 건립되었고(『태종실록』 14년 5월 14일), 이때부터 우사단에서의 제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태종실록』 14년 5월 27일). 국가의 제사 체계에서의 등급은 중사로 인정되었다.

태종대 우사단에서 시행된 의식이 어떠한 내용인지는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태종대의 제사의식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평가받는 『세종실록』「오례」 길례 의식에는 우사단에서 시행한 제사의식으로 ‘우사의(雩祀儀)’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우사와 관련된 제반 규정 및 행례(行禮) 절차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것 외에 우사단에서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었던 기우제의 절차는 ‘우사단기우의(雩祀壇祈雨儀)’로 따로 기록하였다.

『세종실록』「오례」에 수록된 ‘우사의’와 ‘우사단기우의’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조선의 기본 예전인 『국조오례의』에 기재되었다. 이후 숙종대까지 별다른 변동 없이 이 규정에 따라 제사가 지속되었다.

영조대에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가 편찬되면서 우사 관련 의식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가뭄 때에 시행되는 기우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국왕이 직접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친향우사단기우의(親享雩祀壇祈雨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때 친제의 대상이 된 것은 정기적인 우사제가 아니라 부정기적인 행사인 우사단에서의 기우제였다. 이 방식은 정조대 편찬된 『춘관통고』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절차 및 내용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우사의 제사 절차는 크게 제사 전의 준비과정과 당일에 실제제사를 시행하는 행례(行禮)의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준비과정은 시일(時日), 재계(齋戒), 진설(陳設), 전향축(傳香祝), 성생기(省牲器) 등의 과정이다. 우사가 시행되는 시기는 맹하(孟夏)인 4월이다. 헌관(獻官)은 초헌을 정1품이 담당하고, 아헌을 정3품 당상관이, 종헌은 정3품이 각각 담당하였다. 재계는 제사의 경건함을 유지하는 행동으로 우사가 중사의 등급이기 때문에 산재(散齋) 3일, 치재(致齋) 2일 총 5일을 시행한다. 산재는 제관(祭官)이 치재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 일상 업무는 정상적으로 수행했으며 평소의 자기 집의 침소에서 잤다. 치재는 산재 이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재계하는 것으로, 치재 기간에는 전적으로 제사에 관련된 일에만 전념하였다. 진설은 제수 및 헌관의 자리 등을 설치하는 것을 말하는데, 제사 2일 전부터 시행한다. 제사 전날에 초헌관(初獻官)은 승지(承旨)에게 제사에 쓸 향과 축문을 받고, 아울러 제사에 쓸 희생과 제기를 살핀다. 우사에 쓸 희생(犧牲)은 양 3마리와 돼지 3마리이다. 신위는 구망(句芒), 욕수(蓐收), 현명(玄冥), 축융(祝融), 후토(后土), 후직(后稷) 등 6위이다.

본격적인 제사의식인 행례는 신위에게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와 술을 올리는 작헌(酌獻)의 2단계로 다시 구분된다. 전폐는 폐백을 올리는 것으로, 먼저 구망의 신위에게 3번에 걸쳐 향을 피우는 삼상향(三上香) 뒤에 전폐를 행하고 이후에 몸을 엎드린 후에 일으켜 편다. 구망에게 전폐가 끝나면 욕수→현명→축융→후토→후직의 순서대로 폐백을 올린다.

전폐가 끝나면 3번에 걸쳐 술을 올리는 작헌례가 시행되었다. 먼저 초헌관이 구망에게 술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는다. 끝나면 초헌관이 몸을 엎드린 후에 일으켜 편다. 구망에게 시행되는 초헌이 끝나면 욕수→현명→축융→후토→후직의 순서대로 초헌례를 시행한다. 6위에 대한 초헌례가 끝나면 아헌관(亞獻官)이 구망 이하에게 술잔을 올리고 몸을 엎드린 후에 일으켜 편다. 아헌례가 끝나면 종헌관(終獻官)이 6위에게 아헌례와 동일하게 마지막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례를 시행한다.

작헌례가 끝나면 초헌관이 제수로 올린 술과 고기를 맛보는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시행한다. 음복례가 끝나면 4배를 시행한 뒤 제기를 거두고 폐백을 구덩이에 묻고 과정을 지켜본다. 이후 신위판을 갈무리하고 제관들이 퇴장하면 의식이 종결된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우사는 기우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유사한 성격인 풍운뇌우(風雲雷雨) 및 악해독(嶽海瀆), 산천(山川), 성황(城隍) 등의 제사와 연결되어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고, 때에 따라서는 이들 제사와 합제(合祭)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1416년(태종 16) 무당들을 우사단에 모아 삼각산, 한강, 풍운뇌우, 산천성황의 신들에게 기도한 사례에서 보듯이 가뭄이 심각할 때에는 유교적 제사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무속적인 기우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6년 5월 19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남제서(南齊書)』
  • 『수서(隋書)』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예기(禮記)』
  • 『명집례(明集禮)』
  • 『홍무예제(洪武禮制)』
  • 김철웅, 『한국중세의 吉禮와 雜祀』, 경인문화사, 2007.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 연구』, 일조각, 1991.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 한형주, 「성종-중종대 農桑 관련 국가제례의 변화양상과 祭儀」, 『역사와 실학』43,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