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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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선조 39) 『조선왕조실록』 등 귀중한 책과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강원도 오대산에 설치한 사고(史庫).

개설

조선전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이나 주요 서책 보관이 춘추관과 외사고(外史庫)인 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의 4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사고 등 모든 사고가 불에 탔고, 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사고본만 소실을 면하였다. 이 전주사고본을 기초로 임진왜란이 평정된 이후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사이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조선왕조실록』 3부를 활자로 출판했다. 이리하여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과, 간행하면서 만들어진 교정본을 합하여 5부가 있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오대산 사고는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었는데, 월정사(月精寺)가 수호하였다. 사고가 위치한 주변의 정경은 김홍도가 그린 ‘오대산사고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사고는 월정사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중대(中臺)의 남호령(南虎嶺) 아래에 있었는데, 삼재(三災: 수재, 화재, 바람)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오대산사고에는 5부의 『조선왕조실록』 중 소실된 『조선왕조실록』을 복원하기 위하여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편찬하여 인쇄본으로 사용된 교정본이 있었다(『선조실록』 39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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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조선전기 읍치(邑治) 지역에 사고를 두었다가 전쟁과 화재를 당해 『조선왕조실록』 등을 소실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고를 산간과 섬에 두어 실록 등의 보관에 만전을 기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605년(선조 38)에 수축된 강화 사각(史閣)을 시작으로 1660년(현종 1)까지 태백산(太白山)·오대산(五臺山)·적상산(赤裳山)·정족산(鼎足山) 등에 4 외사고를 건립하고, 각각의 사고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보 등을 보관하였다. 춘추관사고는 아직 춘추관이 복원되지 않았으므로 일단 병조(兵曹)에 두어졌다. 이렇게 해서 조선후기의 사고제는 서울의 춘추관사고와 지방의 4사고를 포함한 5사고 체제로 정착되었고, 이것이 조선말까지 계승되었다. 오대산사고에 봉안된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져 보관되다가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최근에 소실을 면하고 일부 남아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으로부터 반환되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오대산사고는 2층의 목조 기와집으로, 2동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었다. 앞의 건물이 사각(史閣)이고 뒤의 건물은 선원보각(璿源寶閣)이었다. 그 주위에 방화벽으로 낮은 돌담이 쌓여 있었고, 동쪽과 남쪽에 문을 두었다.

사각의 구조는 전후 2동이 같은데, 2층은 4칸이고 1실로 되어 있었으며, 1층은 비워 두었다. 사각에는 선원보각과 달리 2칸짜리 방 하나가 있었다. 원래는 1칸이었는데, 1893년(고종 30) 의궤를 봉안할 때 공간이 좁다 하여 1칸을 증축하였다.

부속 건물로 사고 동쪽에 별관과 영감사(靈鑑寺)가 있다. 별관은 목조 단층 건물이었는데 봉심(奉審) 관원이 숙소로 사용하였고, 영감사는 월정사의 속사로서 사고를 지키는 승려인 수호승(守護僧)이 묵었으므로 사고사(史庫寺)라고도 불렀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국사편찬위원회 편, 『사고지(史庫址) 조사 보고서』, 국사편찬위원회, 1986.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배현숙, 『조선 실록 연구 서설』, 태일사, 2002.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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