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역(嶺東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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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거산도에 속한 역.

개설

영동역(嶺東驛)은 조선 태종 연간에 함길도 길주에 신설되었다. 세종대에는 함길도의 역도(驛道)인 명원도(明原道)에 소속되었다가 시리도(施利道)로 이속되었다. 성종대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거산도(居山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거산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조에 따르면, 영동역은 1414년(태종 14)에 설립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살펴보면, 당시 영동역에는 역리(驛吏) 250명, 역노(驛奴) 340명, 역비(驛婢) 150명과, 상마 2필, 중마 6필, 하마 12필 등 총 20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영동역이 거산도의 속역으로, 길주 남쪽 90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영동역은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켰을 때,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관군의 주둔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13년 8월 12일).

변천

태종 연간에 설치된 영동역은 1446년(세종 28)에, 그 전해에 신설된 명원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세종실록』 28년 11월 17일).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영동역이 시리도의 속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가 1432년(세종 14) 이전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태종대 신설된 영동역은 신설 초기 시리도에 소속되었다가 1446년(세종 28) 명원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함원역(咸原驛)·신은역(新恩驛)·평포역(平浦驛) 등 18개 역과 더불어 거산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별다른 변화 없이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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