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餘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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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을 경제적으로 보조하는 봉족의 별칭이나, 정군에 배당된 정식 보인 외의 보인을 지칭함.

개설

조선전기의 여정은 본래 한 호에 정군(正軍)을 세우고 난 나머지 장정을 일컬었다. 그 후, 현역에 복무하는 정군에 대한 경비 부담과 그 집안 살림을 보살펴주는 일을 맡은 봉족(奉足)을 여정(餘丁) 혹은 여보(餘保)라고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군에 배당된 양인 신분의 정식 보인[良保]에 대하여 그 이외의 보인을 여보라 지칭하였다. 18세기 전반기에 군역을 정액화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이를 초과한 나머지 군역자가 보인으로 전환되어 여보의 명목으로 군포를 납부하기도 하였다.

담당 직무

봉족으로서 여정 혹은 여보인 경우는 정군의 입번 및 훈련 등의 복무 비용이나 남아 있는 정군의 가족을 경제적으로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양보에 대하여 그 이외의 여보로 존재하는 경우에는 양보의 반액을 납부하여 소속 기관의 재원을 충당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 지방의 수군은 군액이 정해져 있어서 한 호에 장정이 여럿 있는 경우는 여러 명을 정군으로 세우고 나머지 장정을 타인에게 지급하였기 때문에 민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398년(태조 7)에 한 호에 2~3정이 있는 경우는 정군을 1명 세우고, 4~5정이 있는 경우는 정군을 2명 세웠는데, 나머지 장정은 타인에게 지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태조실록』 7년 윤5월 11일). 그럼에도 여정을 타인에게 지급하는 관례가 봉족을 여정 혹은 여보로 지칭하게 하는 흔적을 남겼다.

1689년(숙종 15) 군역정책을 위한 조사에서 충청도는 양민을 양여정(良餘丁)이라 하고, 서얼을 음여정(陰餘丁)이라 하여 해마다 군포를 거두어들이고 있음이 밝혀져 그 제도가 폐기되었다(『숙종실록』 15년 4월 21일). 서얼의 음여정을 양보에 대한 여보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속대전』 규정에 따르면 “천인이었다가 양인이 된 자가 양역을 부담하면 포 2필을 납입한 자는 그대로 두고, 1필을 납입한 자는 여정에 이속시킨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양역변통(良役變通) 과정에서 역종별 군액을 일정 액수로 고정하면서 남은 군액의 소속자는 다른 군역의 정액에 모자라는 수를 보충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을 여보로 만들어 포를 징수함으로써 계속 그 기관의 재원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다만 1752년(영조 28)의 균역사목(均役事目)에는 경상도 7진의 수군(水軍)이 혁파되면서 그 일부가 양여보미(良餘保米)를 납부하는 여보로 전환된 사실이 확인되었다(『영조실록』 28년 6월 29일). 19세기에도 지방의 군영에 소속된 양여보의 액수는 계속 조정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