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무(餘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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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군영이 재원 확보 활동의 일환으로 설치한 잡색 군역.

개설

지방의 군영이 사사로이 모집한 군역자 가운데 무예를 익혀 무학(武學)이나 기타 군관의 명칭을 확보한 자들을 일컬었다. 이들은 군영의 액외(額外) 군액이므로 모두 삭감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678년(숙종 4)에 각 도의 감영·병영에서는, 장인(匠人)이나 모속(募屬)을 칭탁하거나, 여무(餘武) 혹은 둔군(屯軍)이라 일컬으며 교묘히 명목(名目)을 만들어 여러 고을에 바둑돌처럼 포열(布列)해 있는 자들이, 한 읍(邑)에 많으면 60~70명이 되고, 적어도 30~40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데, 일단 영안(營案)에 소속되면 감히 누가 어찌하지 못한다고 언급하였다(『숙종실록』 4년 1월 16일).

각 도의 감영과 병영에서 수취하는 포(布)의 액수는 중앙정부가 걷는 군포보다 약간 가벼웠다. 이 때문에 군역에서 벗어나려는 백성들이 서로 감영과 병영에 귀속하고자 하여, 영속(營屬)은 날로 증가하고 정식 군역을 감당할 양민은 날로 줄어들었다. 그 결과 각 읍에서 군역을 부담할 만한 장정을 얻지 못하고, 그 대신에 이미 죽고 없는 자[白骨]나 어린아이[兒弱]에게 부당하게 군역이 부과되었다.

변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군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개선책은 조선전기 법전 상에 정액화된 군액을 기준으로, 그 이외의 군액은 삭감 내지 제한하는 조치들로 이루어졌다. 정액화된 군액에 대해서는 실제로 양정(良丁)을 일인일역(一人一役)의 단역(單役)으로 채워, 군역 파악을 현실화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의 각 영진에 소속된 군역자의 정액은 1713년(숙종 39)과 1714년(숙종 40)의 계사사정(癸巳査定)과 갑오사정(甲午査正)으로부터 시작되어 1730년대에 본격화되었다. 우선 군관을 위시한 양인 군역자에 대한 정액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감영 및 군영 그리고 군현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이처럼 군현별로 정액의 군역자를 확보함으로써 1740년대에는 전국 단위로 군역자의 소속별 역종별 군액을 기록한 『양역실총(良役實摠)』이 작성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여무의 설정은 사라졌다.

참고문헌

  • 『양역실총(良役實摠)』
  • 손병규, 「18세기 良役政策과 지방의 軍役運營」, 『軍史』 39, 國防軍史硏究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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