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良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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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병이나 소속 기관의 보인으로 있는 양인.

개설

군병이나 소속 기관에 재정을 보조를 하는 역할을 하는 보인(保人)은 번을 서거나 조련을 하는 군병과 마찬가지로 양인(良人) 중에서 선정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주로 지방 소재 군영에 소속된 군인이나 보인은 양정(良丁)의 부족으로 인해 사천(私賤) 가운데 충당되는 경우가 많았다. 양천(良賤)제에 기초하여 양인 남성은 군역을 비롯한 국가의 공적인 국역(國役)에 종사하였고, 천인 가운데 공천(公賤)은 국가기관이나 왕실에 소속되어 신공(身貢)을 납부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개인에게 귀속된 사천에게도 군역이 부과되었다. 양보(良保)는 주로 천인으로 국역을 지는 자들에 대하여 양인의 보인을 상대화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담당 직무

양보는 양인 신분이라는 점과, 군포 등의 납부 부담이 사천 보인보다 많은 점을 제외하고는 일반 보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보인은 번을 서기 위하여 상경하거나, 지방에서 수비 및 훈련에 임하는 군병에게 군포·군미(軍米)·군전(軍錢) 등을 지급하여 경제적으로 보전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보인은 이를 해당 군병에게 직접 바치거나 소속 기관의 사정에 따라 관에 납부하기도 하였다.

변천

양보에 관한 조선후기 기사를 살펴보면, 사천 대신 양인을 보인으로 책정하면서 야기되는 문제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황해도병영(兵營)에는 역이 비교적 수월한 수영패(隨營牌)에 투속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광해군 초에 이를 단속하는 제도가 생겼다. 조정에서는 종전에 수영패에 투속하였던 자 중 정군에 다시 편입된 자들에게 사천으로 2보(保)를 충정(充定)시켜 주도록 하였는데, 1699년(숙종 25)에 황해병사(黃海兵使)가 사천 대신 양보를 섞어서 충정시킴으로써 파직되는 일이 있었다(『숙종실록』 25년 4월 29일). 숙종 25년의 조치는 1720년(경종 즉위)에 다시 거론되었는데, 이때에는 양보는 군역을 지게하고, 대신 공사천 2명을 보인으로 충정시키자는 내용으로 논의되었다(『경종실록』 즉위년 9월 25일).

한편 숙종 46년에는, 외방(外方)의 봉수군(烽燧軍)은 본래 고역(苦役)이기 때문에 보인 3명이 주어지는데 한정(閑丁)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그중 2명만 양인으로 충당하자는 논의가 있었다(『숙종실록』 46년 4월 5일).

18세기 전반기에 양인 군역에 대한 정액화가 시도되었다. 그에 따라 역종별 군역자의 수가 확정되고 양인 보인으로부터 징수하는 포를 반으로 줄여서 균일화하는 균역법이 진행되었다. 뒤이어 사천 군역자도 역종에 따라 액수가 확정되어 갔는데 그들의 군포 부담은 양보의 절반 수준이었다.

참고문헌

  • 『양역실총(良役實摠)』
  • 손병규, 「호적대장 職役欄의 군역 기재와 ‘都已上’의 통계」, 『대동문화연구』 39,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