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지도(兩界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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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서북 지역과 그 북쪽의 중국 영토에 해당하는 양국 간 경계의 관방(關防) 정보를 그린 지도.

개설

조선전기 세종대에 서북 지역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국방상 요충지에 4군 6진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이 지역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당시 서북 지역의 정세를 논할 때 정척이 제작한 양계지도(兩界地圖)가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양계 지역의 지도 정보는 『성경통지』와 같은 중국 사료까지 동원하게 되면서 조선 서북 지역과 청나라 국경 일대로 확대되었다. 남구만이 1697년(숙종 23)에 그린 「성경지도(盛京地圖)」는 18세기 제작된 여러 종류의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之圖)’류의 모본(母本)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대 북방 영토의 방비(防備)에서 비롯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은 숙종 때 관방의 필요성이 확대되면서, 당시 북방 여진족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 지도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게 된다. 그 결실이 바로 남구만이 『성경지』에 포함된 「성경지도」를 확대하여 만든 「양계지도」와 이이명이 그려 올린 「요계관방도」라 할 수 있다.

숙종대에 추진된 북방 개척 사업은 영조대에도 계승되어, 두만강·압록강 이남 지역은 물론, 강북(江北) 지역에 대해서도 청인(淸人)의 거주를 저지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인 방어에 나섰다. 백두산정계비에 언급된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과 구별하는 지도가 다수 제작되고, 고려시대 윤관(尹瓘)이 세웠다는 선춘령(先春嶺)의 고려경(高麗境) 비석을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에 그려 넣은 지도가 유행한 것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내용 및 특징

1450년(문종 즉위) 문종은 하연, 김종서 등 대신들과 평안도 연변의 긴요하지 않은 관문(關門)의 만호와 군병을 혁파하는 논의를 할 때 「양계연변지도」를 참고하게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26일).

1451년(문종 1) 예조 참판 정척이 「양계지도」를 수찬하여 바쳤는데, 문종이 지금까지 본 지도 중 가장 상세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에 문종은 양계 지역의 각 고을에서 척량하여 올려 보낸 것을 참조하여 명산, 대천, 대령, 옛 관방, 옛 고을을 자세하게 교정하도록 하였다(『문종실록』 1년 5월 29일). 당시 전해진 정척의 「양계지도」는 대지도와 소지도가 있었다(『성종실록』 13년 2월 13일).

1455년(세조 1) 평안도경차관양성지가 연연, 무창, 우예 등의 군현지도를 가져와 바치고, 평안도 내의 일을 보고하면서 양계 지역의 인물을 발탁하여 설치한 토관(土官)의 품계를 더해줄 것을 청하였다(『세조실록』 1년 11월 10일).

변천

1673년(현종 14)에 함경감사남구만(南九萬)이 함경도의 육진(六鎭) 및 폐사군에 순찰 나가 방곡(方谷)의 요해지가 될 수 있는 곳을 살핀 후 무산(茂山), 후주(厚州), 폐사군 등에 고을을 설치하는 일과 길주(吉州)·갑산(甲山) 사이에 길을 내는 것 등 3건의 일로써 상소하면서 「성경지도(盛京地圖)」를 올렸다. 이에 현종은 남구만의 요청을 윤허하여, 1674년(현종 15) 봄에 북쪽으로 무산·풍산(豊山)·양영(梁永) 등에 진보(鎭堡)를 설치하고 서쪽으로 후주를 설치하여, 점차로 연강(沿江)을 개척해갈 계획을 세웠다. 그 후 1683년(숙종 9)에 자성(慈城) 등의 지역에 변장(邊將)을 둘 것을 청하여 설치했다가 바로 혁파하게 되었고, 1685년(숙종 11)에는 조정의 의론으로 무산과 후주까지 아울러 혁파하려 하자, 남구만이 적극 설득하여 결국 후주만 혁파하고 무산은 남겨두었는데, 1778년(정조 2) 당시에 만호(萬戶) 규모의 고을을 이루었다(『정조실록』 2년 1월 13일).

남구만은 1696년(숙종 22)에 청나라에 다녀온 사람이 청나라 민가에서 『성경지(盛京誌)』를 보았으나 구매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1697년(숙종 23)에 연행 사절을 통해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남구만이 『성경지』 구득에 관심을 둔 것은 성경(盛京) 즉 심양이 청나라가 처음 요동을 차지하고 도읍을 정했던 곳이므로 기록이 상세할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남구만은 역참과 도로를 상고하여 심양의 동북에서 오라(烏喇)까지 8백 리, 오라 동남에서 영고탑(寧古塔)까지 4백여 리로 총 1천 3백 리로 계산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나라에서 변란이 있을 경우 쫓겨 가게 될 만주족의 퇴로를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남구만은 『성경지』 내의 지도를 확대하여 도로를 표시하고 산천(山川)·주현(州縣)·참로(站路)의 이름을 기재하였으며 지도 아래 역대의 연혁과 관청을 대략 기록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다(『숙종실록』 23년 5월 18일).

1706년(숙종 32) 이이명이 「요계관방도」를 바쳤는데, 『성경지』에 기재되어 있는 오라지방도(烏喇地方圖), 17세기 전반 항해로 조공을 바치던 노정, 서북의 강과 바닷가 경계 등을 취합하여 제작한 지도였다(『숙종실록』 32년 1월 12일). 이후 1712년 청나라와의 백두산 정계를 계기로 조선과 청국 간의 국경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영조대에도 조선과 청의 양국 경계에 대한 지도가 다수 제작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지도 중 조선의 북부 지방과 청나라 만주의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관방지도(關防地圖)로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 『해동지도』 속에 포함된 「서북피아양계전도」 등이 있다. 지도 제목의 ‘피아(彼我)’는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조선의 관북과 관서 지방 및 만주, 몽고, 러시아 연해주를 포함하였다. 조선 북부 지역의 하계망과 산맥, 주요 산과 군현, 도로망과 주요 요충지를 자세하게 표시하였고,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을 위시한 국경 지대의 상세한 교통망과 군사 요지가 표시되어 있다.

이들 지도의 제작 연대는 1712년에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표시되어 있고, 1776년(정조 즉위) 초산(楚山)으로 개명된 이산(理山)의 지명이 그대로 적혀있어 그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정조실록』 즉위년 5월 22일).

청나라 만주 지방은 조선처럼 상세하지는 않지만, 청나라의 만주봉금(封禁) 정책에 따라 설치한 목책 장성인 성책(城柵)과 만리장성의 일부가 표시되어 있다. 의주, 봉황성, 성경을 거쳐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연행 노정과 도중의 관(關), 역참(驛站), 진보(鎭堡) 등의 요지를 자세히 표시하였다. 또한 조선의 회령, 경원에서 영고탑, 개원(開元)을 거쳐 성경에 이르는 경로도 비교적 자세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오라와 영고탑이 붉은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내용으로 보아 숙종대 이후 조선의 서북 지역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제작된 관방지도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참고문헌

  • 이찬, 『한국의 고지도』, 범우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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