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沈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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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6년(세조 2) = ?]. 조선 초기 문종(文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과 이조 좌랑(佐郞) 등을 지냈다. 본관은 부유(富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직장(直長)심철보(沈哲甫)이고, 할아버지는 호조 판서(判書)심도원(沈道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부성군(富城君)심효생(沈孝生)이다.

문종~세조 시대 활동

1450년(문종 즉위년)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에서 13위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文科榜目)』] 1451년(문종 1)에 예문관 검열(檢閱)로서 당시 집현전(集賢殿)부교리(副校理)였던 서거정(徐居正), 집현전 수찬(修撰)이었던 허조(許慥) 등과 함께 경외(京外)에서 독서하는 것을 허락받고 달마다 쌀과 술을 하사받았다.(『문종실록』 1년 11월 25일) 1454년(단종 2) 집현전 수찬을 역임할 때, 대궐 안의 관청에서 기녀를 불러 회음(會飮)한 일에 연루되어 하위지(河緯地), 강희안(姜希顔) 등의 다른 집현전 관원들과 함께 사헌부(司憲府)의 추핵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 때 집현전 관원들은 죄를 추핵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았다.(『단종실록』 2년 7월 7일)

1455년(세조 1)에는 병조 판서이계전(李季甸),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정창손(鄭昌孫), 예문관 제학(提學)박팽년(朴彭年) 및 집현전 관원들과 함께 관제를 편찬하는 일을 맡았다.(『세조실록』 1년 9월 2일) 1456년(세조 2)에는 사간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박팽년, 하위지 등이 모의한 <단종복위운동>의 가담자로 지목되었다.(『세조실록』 2년 6월 9일) 그 결과 심신(沈愼)은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고, 그의 자식들은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심신의 아내 석정(石貞)과 딸 심금정(沈金正), 심은정(沈銀正) 등은 계림군(雞林君)이흥상(李興商)에게 천역(賤役)으로 정속(定屬)되었고, 충주(忠州)와 상주(尙州) 등에 있던 그의 전지는 황수신(黃守身), 한명회(韓明澮) 등에게 분급되었다.(『세조실록』 2년 6월 8일),(『세조실록』 2년 6월 9일),(『세조실록』 2년 6월 18일),(『세조실록』 2년 9월 7일),(『세조실록』 3년 3월 23일) 한편 1474년(성종 5) 심신에게 연좌되었던 이석원(李石員), 이금정(李金精), 이은정(李銀精), 이복정(李福精) 등을 놓아주는데, 부인과 딸들인 것으로 보인다.(『성종실록』 5년 7월 12일)

신원 복권 과정

단종복위운동 이듬해인 1457년(세조 3)에 김시습(金時習)은 충남 공주 동학사(東學寺)에 제단을 만들어 사육신(死六臣)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端宗)의 제단을 증설했다. 이어 1458년(세조 4) 세조가 직접 동학사에 찾아와서 단종복위에 연루된 280여 명의 성명을 써서 비단에 넣어 초혼제를 지냈는데, 동학사 초혼기(招魂記)에 따르면 심신도 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단종조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국당유고(菊堂遺稿)』 부록 「공주동학사초혼록(公州東鶴寺招魂錄)」],[『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동학사혼기석(東學寺魂記釋)」]

그리고 1791년(정조 15) 정조(正祖)가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하고 단종복위와 연루된 자들을 추향했는데, 이 때 심신은 별단(別壇)에 속해 복권되었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참고문헌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당유고(菊堂遺稿)』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