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립장(繩笠匠)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삼끈[麻繩]으로 갓을 만드는 장인.

개설

승립장(繩笠匠)은 삼끈[麻繩]을 엮어서 만든 갓을 만드는 장인으로 승결립장(繩結笠匠)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원·사·서인이 구별 없이 초립을 널리 착용하였다. 초립의 정조(精粗)로 신분 귀천을 구별하였고 갓이 발달하면서 초립과 승결립은 상민이나 하리(下吏)들만 착용하게 되었다. 대나무를 실같이 가늘게 쪼개서 만든 죽사립(竹絲笠)은 죽직립(竹織笠)·부죽립(付竹笠)으로 불렸다. 대를 가늘게 쪼개 엮고 다시 그 위에 나(羅)·주(紬)를 입혔기 때문에 포립(布笠)이라고도 하였으며 왕족이나 고관들이 썼다. 승결립의 형태는 초립, 패랭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승립장은 삼끈[麻繩]을 재료로 갓을 만드는 일을 한다. 승립장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 소속되었으므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상의원 제조구수영(具壽永)이 아뢰기를 승립장들은 먼 도(道)로부터 오는데 그 일이 정교하여 이루기 어려우므로 경중(京中)에 오래 머무르니, 스스로 보존할 수 없습니다. 양료(糧料)를 관급(官給)하소서 하며 급료를 줄 것을 청하면서 그 직무의 정교함을 말하고 있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3일).

변천

공장(工匠)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음은 유물을 통해 알 수 있으나 제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장이 관장(官匠)과 사장으로 나누어지는데, 관장은 다시 경공장(京工匠)외공장(外工匠)으로 구별된다. 공조 이하 29개의 여러 관사에 소속된 경공장의 종류는 130종이고 그 총수는 2,795명이었다. 한편 지방관청에 소속되었던 외공장은 27종으로 그 총수는 대락 3,45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농업을 경영하고 있는 자들이며, 다만 공적에 기록되어 일정한 기한을 관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등재된 모자와 관련된 여러 장색이 있었다. 어의용 공예품을 제작하는 상의원(尙衣院)에는 초립장(草笠匠) 6명, 유립장(襦笠匠) 2명, 양태장(涼太匠) 2명, 모자장(帽子匠) 2명 등이 소속되어 있었고,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공예품을 제작했던 본조에도 초립장, 모자장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 공장 중 승립장은 경공장과 외공장에 그 기록이 없으며 작업이 정교하지만 서인들의 모자를 만드는 일로 인해 따로 명시가 없다. 다만 그 일은 초립장, 유립장과 유사한 과정일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승립(繩笠)의 기록을 보면, 1482년(성종 13)에 도망 중인 죄수 송윤종(宋胤宗)이 훔친 관물의 목록 중 사모(紗帽) 3개, 승립 1개의 기록이 있고(『성종실록』 13년 5월 21일), 1491년(성종 22)에 영안북도절도사성준(成俊)에게 내린 하사품 물목에 궁시(弓矢)·건복(鞬服)·도자(刀子)·당승립(唐繩笠)의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22년 2월 11일). 그 후 1522년(중종 17)에는 “부죽립·승립·나과립(羅裹笠)은 학생(學生)·서인(庶人)·공인·상인들의 사용을 아울러 금하고”라는 기록에서(『중종실록』 17년 8월 12일) 조선초기 승립은 승립장이 있어 작업이 정교할 만큼 품질이 좋고, 착용에 제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85년(정조 9)이 되면 “함경남도 북쪽 지역 사람들 모두가 구의(狗衣)와 승립 차림으로 매우 가난하여”라는 기록에서 점차 승립은 서인들의 모자로 널리 착용된 것으로 보인다(『정조실록』 9년 7월 14일).

조선후기 이후 학자들은 갓은 형태와 기법 면에서 패랭이에서 비롯하였으며, 패랭이를 미적으로 개선하고 단순화시킨 것으로 연유하였고 조선초기 초립을 거쳐 갓으로 발전되고 다듬어져 유행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목민심서(牧民心書)』
  • 장경희, 『조선시대 관모공예사연구』, 경인문화사, 2004.
  • 강순제, 「우리관모의 시말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