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용산림(崇用山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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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내에 산림(山林) 인사를 중용하자는 논리.

개설

산림(山林)이란 뛰어난 학문과 덕망을 겸비해 국가의 부름을 받는 인사를 말한다. 산림은 16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인조반정 이후 산림을 통해서 정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반정 공신들을 중심으로 숭용산림(崇用山林)에 대한 비밀 협약이 있었다. 산림의 중용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나, 그 영향력은 정치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산림이 등장한 것은 대체로 16세기 후반 서인계 성혼(成渾)과 북인계 정인홍(鄭仁弘) 등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뛰어난 학덕으로 인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국정 운영의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자파(自派) 붕당의 이론적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정치에서 산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인조반정 직후 반정 공신들은 자신들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두 가지의 내용을 밀약하였다. 하나는 숭용산림이고, 하나는 물실국혼(勿失國婚)이었다. 산림의 중용을 통해서 정치 명분을 확보하고, 국혼을 통해 정치적 실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인조반정 직후 서인계의 김장생(金長生)이나 남인계의 장현광(張顯光) 등이 조정에 출사(出仕)하였다.

변천

인조대 이후 반정 공신들의 밀약에 따라 산림의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우대하기 위해 기존의 관료 조직과는 다른 별도의 산림직(山林職)을 신설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설치된 성균관의 종4품 사업(司業), 1646년에 설치된 세자시강원의 정3품 당상관인 찬선(贊善)과 종5품의 익선(翊善), 종7품의 자의(諮議), 그리고 1658년(효종 9)에 설치된 성균관의 정3품 당상관인 좨주(祭酒)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산림의 중용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숙종대 이후 왕권 강화가 추진되면서 상대적으로 산림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영조대에는 산림이 정치에 물들었다고 배척되면서, 숭용산림의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영조실록』 7년 6월 27일).

참고문헌

  • 『당의통략(黨議通略)』
  • 우인수, 『조선 후기 산림 세력 연구』, 일조각,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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