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무영(巡撫營)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후기에 변란에 대처하거나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군영.

개설

순무영은 영조대부터 고종대까지 변란이나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여 운영하던 군영이다. 홍경래 난과 동학농민전쟁 등 대규모 변란을 진압하였고,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순무영은 1728년(영조 4)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순무사(巡撫使)의 지휘를 받던 군영이다. 태조대부터 특별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그때그때 설립되어 운영되어 왔으나, 순무사가 관할하는 순무영은 18세기에 와서야 설치되었다. 이는 순무사의 임무가 변방의 방어책을 강구하던 것에서 벗어나, 영조대 이후 변란과 외적 침입을 진압하기 위한 것으로 확대되면서 별도로 순무영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조직 및 역할

순무영 조직은 순무사 아래 장관(將官)·중군(中軍)·종사관·별장(別將)·부장령(副將令) 등의 지휘관을 두었다. 군사는 영조대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으로 편성되었으며, 순조대도 이와 같은 편제가 보인다.

변천

영조대 처음 설치되어 1728년 3월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사도도순무사에 병조 판서 오명항(吳命恒), 중군에 박찬신(朴纘新), 종사관에 박문수(朴文秀)가 임명되어 현지에 파견되었다. 순무영이 난을 진압하고 4월에 개선하자, 영조가 친히 숭례문 밖에 나가 영접하고, 순무사오명항과 군사들의 공적을 치하했다(『영조실록』 4년 4월 19일).

1811년(순조 11) 12월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서북 지역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쳤다. 정부는 영조대의 전례를 참고하여 양서순무영(兩西巡撫營)을 설치하고, 포도대장이요헌(李堯憲)을 양서순무사로 삼아 난을 진압토록 했다. 이듬해 4월 난이 진정되자 순무영을 철파하였다(『순조실록』 12년 4월 2일).

1866년(고종 3) 9월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훈련대장이경하(李景夏)를 기보연해도순무사(畿輔沿海都巡撫使)로,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 등을 임명하여 출정하도록 했다. 당시 순무영은 프랑스인 선교사를 처형한 책임을 묻기 위해 강화도를 침범한 프랑스 군을 물리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종친 이규한(李奎漢)이 양이(洋夷) 토벌을 내세우며 사람을 모집하였으므로 순무영에 편입시켰다. 도축업 등에 종사하는 성균관의 반민(泮民) 200명이 자원하기도 했다(『고종실록』 3년 9월 19일)(『고종실록』 3년 9월 20일).

순무영은 프랑스 군이 물러간 10월에 폐지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했다. 호위부장신정희(申正熙)를 양호도순무사에 임명하고, 전라도·충청도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때 민간인 유학(幼學)구완희(具完喜)와 정두섭(丁斗燮) 등이 소모관(召募官)이나 참모관(參謀官)의 자격으로 순무영에 편입하여 농민군 토벌에 동참했다. 구완희는 이를 발판으로 삼아 훗날 경무사(警務使)까지 지냈다. 종로 시전 상인들 또한 수천 냥의 돈을 모아 양호도순무영에 바쳐 군사 비용으로 충당토록 했다.

12월에 들어서 동학농민군이 진압되자, 양호도순무영 또한 철폐하고 출전했던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했다(『고종실록』 31년 12월 27일).

순무영의 임무와 활동 전반을 기록한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홍경래 난을 진압한 기록을 담은 『양서순무영등록』이고, 다른 하나는 병인양요와 동학농민전쟁 진압 기록을 담은 『양호순무영등록』이다. 이 자료들은 순무영을 이해하는 데 필수일 뿐만 아니라, 홍경래 난과 병인양요 및 동학농민전쟁 연구의 기본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