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조서(孫肇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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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봉산군수(鳳山郡守)와 병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자는 인보(引甫)이고, 호는 면재(勉齋) 또는 격재(格齋)이다. 본관은 일직(一直)이다. 아버지는 감찰(監察)을 지낸 손관(孫寬)이고,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김흡(金翕)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손영유(孫永裕)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지낸 손득수(孫得壽)이다. 김종직(金宗直)과 친교가 있었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그에게서 수학하였다.

세종~세조 때의 활동

1432년(세종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435년(세종 17)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이어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를 거쳐 병조 정랑(正郞)과 봉산군지사(鳳山郡知事)를 역임하였다.(『문종실록(文宗實錄)』 1년 8월 5일),[『격재집(格齋集)』 부록 권2 「묘갈명(墓碣銘)」 이하 「손조서묘갈명」으로 약칭]

그리고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손조서(孫肇瑞)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인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발생하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마저 사절하고 두문불출하였다. 단종(端宗)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비록 상복을 입지는 않았으나 상중인 듯이 처신하면서, 본인을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의 ‘미사인(未死人)’이라 자처하였다. 이후 호조 참의(參議)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손조서묘갈명」]

한편 손조서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손윤한(孫胤漢)은 그의 시문들을 모아 4책의 『격재집(格齋集)』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사육신 사건 이후의 행적을 인정받은 손조서는 숙종(肅宗) 대에 대구에 있는 청호서원(靑湖書院)에 배향되었고, 순조(純祖) 대에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 12년 3월 13일),[「손조서묘갈명」]

성품과 일화

손조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뛰어나서 몸가짐을 조심하였다. 학문을 배우기 시작해서는 공부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힘써 부지런히 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서를 읽는 것은 은근한 글과 깊은 뜻은 반드시 반복하여 완전히 능통해진 후에야 마쳤다. 『사물잠(四勿箴)』을 일상생활에 가장 중요한 지침으로 일컬어서 평소 때에 매번 철저하게 외워 마음 속에 품고자 하였다. 또 손에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놓지 않고 밤낮으로 연구하였으며, 김종직,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도의지교를 맺어 경학(經學)을 강론하였다. 김굉필과 정여창 두 선생이 모두 그를 존경하며 배웠다.[「손조서묘갈명」]

후손

부인 진주 하씨(晉州河氏)는 광흥승(廣興丞)하숙(河潚)의 딸로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손윤하(孫胤河)는 광흥승(廣興丞)을 지냈고, 차남 손윤한(孫胤漢)은 장흥부사(長興副使)를 지냈다. 또 장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류수원(柳秀源)의 처가 되었으며, 차녀는 부사직을 지낸 고맹원(高猛元)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격재집(格齋集)』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