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악(俗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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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우리나라의 전통 궁중음악 중 ‘아악’과 대비하여 쓰는 말.

②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연된 전통 궁중무용인 향악정재(鄕樂呈才)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함.

개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음악을 뜻하는 속악(俗樂)은 향악(鄕樂)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당악(唐樂)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속악은 음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 궁중무용인 향악정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에는 속악 항목에 향악정재가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 영조 때 장악원(掌樂院)에서 무동(舞童)이나 처용(處容) 같은 속악을 연습했다는 기사를 통해(『영조실록』 15년 10월 15일), 조선시대에 속악에는 향악정재가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 정재를 향악정재와 당악정재(唐樂呈才)로 분류함에 따라, 학술적으로 속악보다 향악정재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었다.

내용 및 특징

고려시대의 향악정재는 3종목이 전한다. 북춤의 형태인 무고(舞鼓), 12개월의 동동사(動動詞)를 노래하는 동동(動動), “아무 꺼릴 것이 없는 사람은 한 가지 도(道)로써 생사를 벗어난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 무애(無㝵) 등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8종목의 향악정재가 창작되었다. 보태평(保太平)은 조종(祖宗)의 문덕을 기리고, 정대업(定大業)은 무공을 찬미하며, 봉래의(鳳來儀)는 「용비어천가」를 노래하며 춤춘다. 향발무(響鈸舞)는 향발이라는 작은 동발을 손에 매고 춤춘다. 학무(鶴舞)는 청학과 백학의 탈을 쓰고 춤추는데, 조선후기에는 청학 대신 황학이 등장했다. 처용무는 처용 탈을 쓰고 춤추었다. 교방가요(敎坊歌謠)는 왕의 대가(大駕)를 맞는 행로에서 학무와 연화대(蓮花臺) 정재 등을 연출한다. 문덕곡(文德曲)은 태조의 문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춤이다.

순조대 이전에는 5종목의 향악정재가 새롭게 창작되었다. 그중 검기무(劍器舞)는 검기를 양손에 들고 추는 칼춤이고, 첨수무(尖袖舞)는 첨수라는 뾰족한 소매를 무구(舞具)로 사용한다. 선유락(船遊樂)은 신라의 뱃놀이에서 유래하였으며, 초무(初舞)와 광수무(廣袖舞)는 무동만이 공연한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 형식으로 창작된 17종 정재의 창사(唱詞)를 지었는데, 그중에서 향악정재 형식으로 창작된 13종목은 다음과 같다.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은 모란이 꽂힌 꽃병에서 꽃을 한 가지씩 취하여 즐기는 춤이다. 경풍도(慶豊圖)는 풍년을 기원하며 노래한다. 만수무(萬壽舞)는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춤이다. 망선문(望仙門)은 참새 날개가 그려진 부채 모양의 의물인 작선(雀扇)으로 선문(仙門)을 만들어 춤춘다. 무산향(舞山香)은 혼자서 추는 독무로, 침상 모양의 이동 무대인 대모반(玳瑁盤) 위에서 춤춘다. 박접무(撲蝶舞)에는 봄에 나비 놀이를 하는 세시 풍속이 담겨있다. 보상무(寶相舞)는 보상반(寶相盤)에 채구(彩毬)를 던지는 놀이를 춤으로 나타낸다. 사선무(四仙舞)는 신라의 화랑인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祥)·남석행(南石行)을 상징하며 춤춘다. 영지무(影池舞)는 무대 가운데에 네모난 연못인 영지를 설치하고 영지를 중심으로 춤을 춘다. 첩승무(疊勝舞)는 노래가 중심인 정재로, 일첩(一疊)에서 십첩(十疊)까지 칠언 한시를 노래한다. 춘대옥촉(春臺玉燭)은 무대 중앙에 춘대를 상징하는 윤대(輪臺)를 설치하고 춤춘다. 춘앵전(春鶯囀)은 화문석 위에서 느리게 추는 우아한 독무이다. 헌천화(獻天花)는 천녀(天女)가 천화를 뿌리는 산화공덕(散花功德)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순조 연간에 창작된 정재 가운데 효명세자가 창사를 짓지 않은 향악정재는 6종목이다. 고구려무(高句麗舞)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 「고구려」를 창사로 썼다. 공막무(公莫舞)는 항장(項莊)이 검을 휘두르며 춤추자 항백(項伯)이 소매로 그것을 막은 고사를 차용하여 만든 정재이다. 연화무(蓮花舞)는 연꽃이 들어 있는 병에서 꽃을 취하여 춤춘다. 춘광호(春光好)는 봄빛이 좋다는 제목의 정재로, 화사한 봄빛을 즐기는 내용이다. 침향춘(沈香春)은 모란 화병(花甁)을 설치하고, 꽃 한 가지를 취하여 춤춘다. 향령무(響鈴舞)는 금방울 10개를 양손에 매달고 춤춘다.

헌종대와 고종대에 민간에서 궁중으로 유입된 향악정재 3종목은 「관동별곡」을 노래하며 춤추는 관동무(關東舞),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홍문(鴻門)에서 벌어진 잔치를 배경으로 하는 항장무(項莊舞), 사자탈을 쓰고 춤추는 사자무(獅子舞) 등이다.

변천

고려시대 향악정재의 특징으로는 무용수를 무대로 인도하는 죽간자(竹竿子)가 없고, 정재 공연의 시작과 끝에서 노래 부르는 한문 가사의 치어(致語)와 구호가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공연 도중에 기녀들이 부르는 창사의 가사가 한문이 아닌 국문이라는 점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의 향악정재는 고려시대의 것을 전승한 종목과, 건국 초기에 새로이 창작된 종목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의 세 향악정재 가운데 무고와 동동만이 『악학궤범』에 전하고, 무애는 불가(佛家)의 말이 쓰였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향악정재인 봉래의에 당악정재의 형식 요소인 죽간자가 등장한 점, 문덕곡 역시 치어나 반주 음악은 당악정재의 양식을 따른 점 등은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점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향악정재에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순조 연간에 새로운 정재가 많이 창작되었다. 둘째,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당악정재의 특징은 대부분 사라지고 죽간자만이 남아서 향악정재와 구분되는 요소로 작용했으나, 때로는 이마저 생략되기도 하였다. 또한 향악정재에서는 이전과 달리 한시 창사가 등장하기도 하여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특징이 뚜렷하지 않게 되었다. 셋째, 춘앵전이나 무산향 같은 독무가 생겨났다. 넷째, 검무·항장무·사자무 같은 지방의 연희가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한편, 향악정재는 궁중뿐 아니라 지방의 교방에서도 지속적으로 공연되었다. 1865년(고종 2)에 정현석(鄭顯奭)이 편찬한 『교방가요(敎坊歌謠)』에 따르면, 진주 교방에서는 무고·검무·선유락·항장무 등의 향악정재를 교습하고 공연하였다. 다만 춤의 절차와 무대 도구, 의상 등이 궁중에 비해 간소한 형태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순조무자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
  • 『순조기축진작의궤(己丑進爵儀軌)』
  • 『교방가요(敎坊歌謠)』
  •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 『고종신축진연의궤(高宗辛丑進宴儀軌)』
  •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 송혜진, 『청소년을 위한 한국음악사:국악편』, 두리미디어, 2007.
  • 장사훈, 『한국전통무용연구』, 일지사, 1977.
  • 정은혜, 『정재연구Ⅰ』, 대광문화사, 1996.
  • 조경아, 「순조대 정재 창작 양상」, 『한국음악사학보』 3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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