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筬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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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에 속하여 베틀의 바디를 만들던 장인.

개설

조선시대 내내 명나라와 청나라에 조공품으로 보낼 가늘고 얇은 염직물을 제작해야 하였고 그 수량도 연간 200필 내지는 2,000필에 달하였다 따라서 조정은 국가 기관에 성장(筬匠)을 소속시켜 특별히 관리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성장은 직물을 제직하던 관서였던 상의원(尙衣院)에 10명, 내자시(內資寺)에 2명, 내섬시(內贍寺)에 2명, 제용감(濟用監)에 2명 등 총 16명을 소속시켰다. 조선후기가 되면 『경국대전』의 법적 규정을 『속대전(續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 및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계속 유지하지만 상설 아문은 폐지되고 사문화되는 경향들이 있다. 대부분의 상설 아문이 폐지되면서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여러 장색의 장인 또한 관장(官匠) 대신 사장(私匠)을 동원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성장은 왕실용의 특수 직물에 소용될 바디를 만드는 기술적 중요성 때문인지, 조선시대에 걸쳐 국가의 통제 아래 관리되어 왔다.

담당 직무

성장은 직물을 짜는 베틀의 부속으로 사용되는 바디를 제작하는 신역(身役)을 졌다. 그들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고 엮어 바디를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렇게 만든 바디가 직물의 가늘고 성긴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초기 조정은 중국에 금은 세공(歲貢)을 면제받기 위해 1409년(태종 9)부터 1429년(세종 11)까지 20년에 걸쳐 노력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1429년 12월 드디어 금은 세공을 면제받고 그 대신 상당량의 염직 공예품을 바치게 되었다. 금은 세공을 대체한 조공품의 연간 총수량은 명주 100필을 비롯하여 백저포(白苧布) 4필, 마포(麻布) 등이었다. 특히 명나라에서는 15새 내지 20새에 해당하는 얇은 직물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성장은 샛수가 얇은 바디를 제작해야 했을 것이다. 1450년(문종 즉위)에 의하면 진헌에 소용되는 명주는 20새여서 사람마다 능히 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잘 짜는 자가 있으면 관청에 소속시켜서 짜도록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20일).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성장의 직무에도 영향을 미쳐 가늘고 얇게 직물을 짤 수 있는 바디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변천

조선초기 이래 옷감이 화폐적 기능을 담당하였지만, 그것이 16세기에 접어들어 시장 경제가 발달하면서 빠른 기일 내에 옷감을 짜려고 샛수가 낮은 직물[惡布]이 유행하여 2∼3승(升)의 거친 바디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1515년(중종 10)에는 2∼3승으로 성글게 짜는 악포(惡布)와 거친 바디를 만드는 행위를 막으려는 대책을 여러 가지로 강구하였다. 첫째는 기한을 정하여 악포와 거친 바디의 제조를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매우 소극적인 방안으로서 수요가 있는 한 공급을 막을 수 없어 그 실효성이 없었다. 둘째, 기한 내에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악포와 거친 바디의 제작을 막기가 어려우므로 직조할 때 드는 수고비를 값으로 쳐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직물을 짤 때 정면포(正綿布)와 악포를 짜는 노력은 비슷하게 들기 때문에 정면포 1필의 값을 악포 2필의 값으로 쳐주면, 정면포를 짜서 판매하는 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악포의 공급을 저절로 차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 또한 악포를 근원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보다 강력한 제재 조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는 악포를 직조하거나 2~3승의 거친 바디를 만들면 무거운 벌을 주고 용서하지 않아서 저절로 없어지도록 한 것이다(『중종실록』 10년 7월 9일), (『중종실록』 17년 1월 25일). 이렇게 삼 단계에 걸친 적극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1520년(중종 15)에는 악포를 금하기 위해 샛수가 굵은 바디를 만든 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바디장의 경우 이후 2∼3승의 바디를 만드는 자는 초범에 대한 법적 조치와, 재범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취하였다(『중종실록』 15년 9월 16일), (『중종실록』 18년 10월 13일). 그 결과 이후 성근 베를 짜거나 거친 바디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잘 실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후기에는 명주베·모시베·삼베 등을 짜는 직조가 각 가정의 부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시장에는 각종 옷감이 넘쳐나게 되었다. 따라서 베틀을 만드는 바디장도 직조가 성행하는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중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왕실 행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도감에서 활동한 성장들의 이름을 『의궤(儀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바디장을 동원했던 도감의 횟수는 모두 11번이었다. 이들 도감은 1800년에 설치된 국장도감을 제외하면 가례도감이나 진연·진찬도감이었다. 곧 바디장은 왕실 의례 중 가례(嘉禮) 행사를 위해 설치한 도감에 주로 차출되어 한말까지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장경희,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 바디장』,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 장경희, 「조선 초기 면주의 조공제 연구」, 『미술사연구』 16호, 2002.